브레인스토밍

by 이월란 posted Feb 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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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스토밍



이월란(10/02/03)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서로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고 쌈박질 중이다
왕바람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리는 유년의 기억들
폭풍은 곧잘 천둥과 비를 동반하지


0~5세 : 흑백사진 속의 나는 요상한 옷과 털모자를 쓰고 있고
검고 동그란 두 눈동자만이 1960년대의 보석처럼 반짝인다
앙앙 우는 나를 엄만 봉창 너머 담벼락 사이에 세워두곤 했었단다
주인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6~10세 : ‘비오는 날’이란 시로 꼬마시인이 되었다
나를 편애하시던 선생님 덕에 나는 급우들의 질투 속에 살았다
인간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진 가끔 술주정을 하셨고 엄만 라디오에 귀를 대곤 자주 울고 계셨다


11~15세 : 아버지가 반신불수로 쓰러지시던 날은 나의 봄소풍 날이었다
엄마와 언니가 하루종일 죽은 반신을 주무르고 있을 때
나는 수돗가에 오도카니, 울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이제 우린 쪽박을 차겠구나 싶었다


16~20세 : 완쾌되신 아버지는 술담배를 끊으셨지만 바람은 끊지 못하셨다
세상의 루저는 주말의 명화를 보며 매일 심심하게 살기 시작했다
영혼은 세상에 발을 딛지 못하고 루저 밖에서 날아다녔다
이미 잃음에 익숙한 바람의 자식이었다


21~45세 : 나의 영혼을 버리려 바다를 건넜지만 바다 건너에도
바람의 영혼이 살고 있었다, 자식까지 바람을 닮아 나왔다


그래서 굶고 살았니
그래서 벗고 살았니


받은건 삼키고 받지 못한 것만 눈에 걸려 있는 이 인간아!
눈물이 나를 조롱했다
지옥 끝에선 쌈질도 악수도 한 순간이다
  

좀 봐달라고 맡긴 에세이를 찾으러 딸년 방으로 갔더니
퉁퉁 부은 빨간 토끼눈이 아직도 울고 있다
내가 빠뜨린 정관사들은 눈물에 젖어 있었고
내가 빼먹은 접속사들은 콧물에 젖어 있었다
엄마는 늘 행복한 여자로만 보였단다
서로의 눈물을 찍어먹어 보니 같은 맛이다


세상 어디를 가나 먼저 부딪치는 건, 슬픈 과거
세상 어디에 숨어 있어도 제일 먼저 나를 찾아내는 건, 아픈 기억


방을 나오면서 보니
But he never quit playing with love. 란 문장도 고쳐 놓았다
But he never quit playing with my mom's heart. 라고
훨씬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