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위의 철학
이월란(2010-12)
화장실에서 휴지를 갈아 끼울 때마다
지난 세월이 모두
변기 속으로 흘려보낸 똥이었다는 생각
화장지는 꼭 바깥쪽으로 풀리도록 끼우는
습관처럼 지켜내 온 삶의 기준들이
쓰잘데 없는 순간의 고집이었다는 생각
배설의 안도와 쾌감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
손수 빚으시고 놓아주신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
제 손으로 혈관 하나 막고 뚫지 못하는
오만한 것들의 영민한 요령이라는 생각
내속에서 나오는 것들을 왼손으로 닦든
오른손으로 닦든 두 손 다 씻어야 하듯
아무리 씻어내어도 반반한 오물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생각
따뜻해지는 변기 위에서
가슴이 선언한 최초의 모라토리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