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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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12.04.10 10:47

꽃담배

조회 수 457 추천 수 4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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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배


이월란(2012-3)


한 송이씩 제를 피워 올릴 때마다
사육의 향내를 밟고 승천하는 그녀의 두 발
심장으로 가는 피들을 가슴으로 보낸다 했다

팔딱이는 생명이 만드는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은
전시의 유대인 같은,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약자들을 모아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라고

끈적이 살아있는 것들을 슬쩍 그을리고 나올 때마다
지상의 시간은 태우지 않아도 사라지는 거란다
도무지 아까울 것이 없는, 남의 땅 같은 것이어서

외등마저 버린 뒷골목의 어둠이 좋아
환각제를 말아 피우던 십대의 열병이
평생의 지병이 되고 우리는 무병한 환자가 되어 병실을 기웃거리지

한 모금 빨아들인 금단의 호흡마다
번제의 경건한 의식처럼 매캐한 자해 속에서
호흡이 맞아 떨어지는 안개와 생명의 속사정

아멘으로 꽉 채워버린 일요일을 일 년에 쉰 두 번씩 보낸 후에도
앞이 보이지 않아, 도대체 아멘과 나무아미타불의 다른 점을 모르겠어
체취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곳은 없단다

장수를 꿈꾸며 금연의 거리를 건설한 사람들은
평생 목을 매든지, 평생 손목을 그으며 살지
니코친보다 독한. 화학병기 같은 유독한 꿈을 한 개비씩 꺼내 물며

하얀 가운을 입고 진공 청소를 하는 미래인 이기보다
이파리 하나로 거대한 생명의 덩치에게 달려드는 미개인이 될 테야
손가락질 받는 원시인으로 남을 테야

오래 오래 죽어가고 싶을 때마다
타다 남은 꽁초 같은 삶을 밟아 뭉개었다 했다
자칫 방심했다간 산을 태워버리는 것이 그 작은 불씨였다고

젊은 카르테시안이 벽난로 앞에 앉아 지워버린 모든 것에 사인을 하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생각 한 접시씩 비워내며
한 줌씩 피어나는 보랏빛 화염을 마실 때마다

그렇게 불 질러 태워버리고 싶었던 날들
그렇게 척추를 세워 타인의 길 위에 턱, 걸쳐 놓던 순간들이
바싹 마른 허울로 마주앉아 말을 걸어오면

꿈이 불어터진 곳마다 화인처럼 그을리던 살갗
제비꽃의 혼령 같은 세상은 의붓아비의 손길 같아서
쓰린 곳만 애무하는 혐오의 냄새가 났었지

[거울 속의 실체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사이드 미러에 적힌 경고문을 닮은, 비밀한 주문
한 송이씩 필 때마다 당신의 죽음이 한 발씩 가까이 다가옵니다

폐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로움이더라고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살아있는 것이더라고
살아 있다는 것이 꽃잎 하나 피었다 지는 것이더라고

입술 사이 안식처가 부르는
저 가벼운 저주가 왠지 저주스럽지 않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테야, 그녀가 증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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