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148
어제:
379
전체:
5,021,511

이달의 작가
2013.05.24 02:28

칭기즈칸

조회 수 386 추천 수 6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칭기즈칸


이월란(2013-5)


왕래 없던 친지 한 분을 뵈러 간다
심장이식으로 남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이십 오년을 버텨온 그는
간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면 트고 마주앉은 저승사자는
방금 관속에서 일어나 앉은 듯한 그를 품고 있다
버려지기 직전 다시 읽어보는 문장처럼
공허한 육체가 말을 한다
수술이 성공하면 이태는 더 버틸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것도 욕심일 뿐이라고
후진국의 난민처럼 배만 볼록한 그의
식욕은 이미 어린 날의 꿈처럼 모두 사라졌다고
핏기 없는 영어는
국적불명의 죽음으로 저장되기엔
더듬거리는 늙은 아내를 혼자 두기엔
여전히 너무 유창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
우리는 다음이라는 인사를 하고

꼭 일주일 후
그의 다음 소식은 저승사자에게서 왔다
여행을 앞두고 있던 우리는 장례식 대신
방금 시체가 되었다는 그를 보러 간다
늙은 인형처럼 누워 있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반쯤 벌어진 입속으로 황천길만 선명했고
퀭한 두 눈에 씌워진 금테 안경만이
유일한 과거 속의 현재처럼 반짝인다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나타난 금발의 저승사자들은
성직자들처럼 거룩하게 시신을 데려간다
더듬거리던 늙은 아내는 그의 마지막 말은
I love you 이었다고 더 이상 더듬거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검은 옷을 차려 입고 묘지 앞 식당으로 간다
그리고 장례식 비용과 묘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한다
우리는 생일이면 공짜로 배를 태워 준다는
카타리나 섬으로 간다
코리아타운의 칭기즈칸을 먹기 위해 열 시간의 페달을 밟는다

손끝에서 무한으로 사라져 버린 생명을

나는 모르기에
눈앞에서 영원으로 건너가 버린 사람을

나는 모르기에
오지 않을 시간을 살러 간 그를 나는

벌써 잊었기에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71 공항대기실 이월란 2008.05.09 298
1470 제1시집 당신에게도 이월란 2008.05.09 283
1469 제1시집 만성 (慢性) 이월란 2008.05.09 256
1468 제1시집 그리움 이월란 2008.05.09 292
1467 제1시집 중신(中身)의 세월 이월란 2008.05.09 294
1466 제1시집 파도 이월란 2008.05.09 292
1465 제1시집 동대문 이월란 2008.05.09 485
1464 제1시집 어떤 진단서 이월란 2008.05.09 300
1463 나 이제 사는 동안 이월란 2008.05.09 324
1462 마작돌 이월란 2008.05.09 377
1461 레모네이드 이월란 2008.05.09 364
1460 제1시집 오줌소태 이월란 2008.05.09 381
1459 그냥 두세요 이월란 2008.05.09 275
1458 내 마음의 보석상자 이월란 2008.05.09 370
1457 사랑 2 이월란 2008.05.09 299
1456 제1시집 들꽃 이월란 2008.05.09 304
1455 선물 이월란 2008.05.09 236
1454 사랑아 1 이월란 2008.05.09 285
1453 사랑아 2 이월란 2008.05.09 303
1452 날개 달린 수저 이월란 2008.05.09 276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