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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13.05.24 02:28

칭기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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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이월란(2013-5)


왕래 없던 친지 한 분을 뵈러 간다
심장이식으로 남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이십 오년을 버텨온 그는
간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면 트고 마주앉은 저승사자는
방금 관속에서 일어나 앉은 듯한 그를 품고 있다
버려지기 직전 다시 읽어보는 문장처럼
공허한 육체가 말을 한다
수술이 성공하면 이태는 더 버틸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것도 욕심일 뿐이라고
후진국의 난민처럼 배만 볼록한 그의
식욕은 이미 어린 날의 꿈처럼 모두 사라졌다고
핏기 없는 영어는
국적불명의 죽음으로 저장되기엔
더듬거리는 늙은 아내를 혼자 두기엔
여전히 너무 유창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
우리는 다음이라는 인사를 하고

꼭 일주일 후
그의 다음 소식은 저승사자에게서 왔다
여행을 앞두고 있던 우리는 장례식 대신
방금 시체가 되었다는 그를 보러 간다
늙은 인형처럼 누워 있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반쯤 벌어진 입속으로 황천길만 선명했고
퀭한 두 눈에 씌워진 금테 안경만이
유일한 과거 속의 현재처럼 반짝인다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나타난 금발의 저승사자들은
성직자들처럼 거룩하게 시신을 데려간다
더듬거리던 늙은 아내는 그의 마지막 말은
I love you 이었다고 더 이상 더듬거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검은 옷을 차려 입고 묘지 앞 식당으로 간다
그리고 장례식 비용과 묘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한다
우리는 생일이면 공짜로 배를 태워 준다는
카타리나 섬으로 간다
코리아타운의 칭기즈칸을 먹기 위해 열 시간의 페달을 밟는다

손끝에서 무한으로 사라져 버린 생명을

나는 모르기에
눈앞에서 영원으로 건너가 버린 사람을

나는 모르기에
오지 않을 시간을 살러 간 그를 나는

벌써 잊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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