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열매

by 이월란 posted Jun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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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열매


이월란 (2014-6)


서울 간 언니가 사다 놓은 냉장고 위의 바나나는
퇴근하는 아버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장바구니가 결코 흉내 낼 수 없었던
노란 정글의 맛
밀림 속 원숭이가 되어 휙휙 날아다니던
유년의 기억이 입맛을 다시면
더 이상 열대의 과육이 아닌
더 이상 씨 없는 과실이 아닌
애석해져버린 혀끝의 농간

울창해진 미각의 숲 속에서도
아침마다 노란 정글을 따먹는 남편은
비비의 긴 손가락으로 껍질을 벗기며
협박한다, 먹지 않을 거면 내 것만 살 거야
일주일에 일곱 개씩만
썩어서 버리는 건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충분해

이제 난 저 열매를 가질 수 없다
하나라도 먹었다간
바나나보다 더 빨리 시드는 남편의 하루가 날아간다

냉장고 위로 기어오르던 원숭이가 떨어져 내리고
정글로 돌아 가버린 저 싱거운 맛이
아담과 이브의 사과보다 더 오래된 열망이
또 농간을 부리고 있다
알뜰한 당신 너머로 침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