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462
어제:
482
전체:
5,047,104

이달의 작가
제3시집
2014.05.28 04:30

당신을 읽다

조회 수 462 추천 수 7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당신을 읽다


이월란 (2014-5)


첫 페이지의 의혹을 넘겨버린 것도 세월이었다
더 이상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당신을 눕혀두면
눈 밖에 난 활자들도 어둠을 먹고 자란다

신비롭게 제본된 팔 다리를 흔들어 본다

사서처럼 당신을 들고 오던 날 편협한 장르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을 펼치고도 늘 화자였던 나는 바깥이 그리운 아내가 되고
숨 쉬는 것조차 다른 당신을 매일 덮었다

아이들은 생소한 이야기를 시작한지 오래다
 

나의 눈높이로 들어 올린 당신은 한 번씩 버려진 문장처럼 뚝 떨어진다
글자보다 여백이 많은
감명 깊은 나라로 떠난 여행길에서도
당신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개미의 길처럼 작은 통로로 끊임없이 사라지는 주인공을 따라오는 사이
당신은 헌책방의 고서처럼 누렇게 뜨고 있다
신간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나는 돋보기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이 뭐였더라, 당신?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발라 한 끼의 그리움을 번역해낸다
한 번도 대출 받은 적 없는 목록마저 사라졌다
나의 환한 등잔 밑에 숨어 있던 책 속의 길

저자는 죽었다

나비효과처럼 팔랑이는 페이지마다 읽어서 도달할 경지였다면
화려한 세간 밑에서 먼지가 쌓였겠다
더 이상 속독이 되지 않는 느린 벤치 위에서 바람이 당신을 읽고 간다

오래 흘러야 강이 된단다

평생을 먹어도 배가 고픈 우리는 간단한 줄거리를 오래도 붙들고 있다
어느 날은 율법처럼 서 있던 당신을 성경 옆에 꽂아 두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꺼내어 일기를 쓴다

어느 페이지인가에 나의 혼을 접어 두었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91 마지막 키스 이월란 2010.06.28 462
1390 붉은 전사 이월란 2010.06.12 462
1389 깡패시인 이월란 2010.01.07 461
1388 폐경 이월란 2010.12.26 459
1387 딸기방귀 이월란 2010.04.05 459
1386 병신춤 이월란 2010.02.12 459
1385 견공 시리즈 휘파람(견공시리즈 43) 이월란 2009.10.14 459
1384 꽃담배 이월란 2012.04.10 458
1383 외계인 가족 이월란 2010.08.22 457
1382 왼손잡이 이월란 2008.05.07 457
1381 물속에서 이월란 2012.08.17 456
1380 남편 죽이기 이월란 2010.12.26 456
1379 피사의 사탑 이월란 2010.04.23 456
1378 관(棺) 이월란 2010.03.05 456
1377 사인 랭귀지 이월란 2010.01.19 456
1376 망할년 이월란 2009.08.01 456
1375 自慰 또는 自衞 이월란 2010.12.26 455
1374 영문 수필 Anger Management 이월란 2010.06.12 455
1373 제1시집 호접몽(胡蝶夢) 이월란 2008.05.09 454
1372 견공 시리즈 애완(견공시리즈 85) 이월란 2010.12.14 453
Board Pagination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