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세요? 2.

2003.02.15 11:09

장태숙 조회 수:680 추천:45

이른 아침, 쵸코렛 향기 그윽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마당으로 나서면 흰 망사 커텐을 드리운 것 같은 안개 속에서 커다란 산의 실루엣처럼 우뚝 서있는 당신을 봅니다.
내 어깨쯤 오는 하얀 페인트칠한 나무 담장 너머, 저쪽 편에 서 있는 당신이 어디를 보고 있든지 간에 나는 강 중심으로 날아 온 돌이 풍덩 떨어지듯, 그 돌이 강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처연함과 묵직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내 시야를 온통 사로잡는 당신.
맑게 개인 하늘이 붉은 실타래를 끊임없이 풀어내는 태양을 밀어 올릴 때쯤 수런거리던 안개는 앞산 이마에서 잠시 흐느끼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뽀얗던 당신의 형체도 윤곽이 뚜렷해집니다.
아침 바람결에 풍성한 머리카락 휘날리며 기지개를 켜듯 쭉쭉 뻗는 팔은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로 탄탄해 보입니다.
당신의 우람한 가슴으로 맑고 투명한 햇살이 스며들면 많은 새들이 깃을 치며 날아가고 재재거리는 새소리는 싱그러운 음악처럼 내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 줍니다.
내 집 새장 속의 새마저 목청 높여 떠들곤 하지요.
나의 아침은 늘 이렇게 작은 소란스러움 속에서 시작됩니다.
아름답고 멋진 당신.
당신을 만나는 것이 어느새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금, 처음부터 당신이 멋져 보였다거나 연모했던 건 아니었음을 당신도 아실 테지요?
내가 한국을 떠나 이국 땅의 이 집에 처음 오던 날.
마당으로 들어서며 담장 너머의 눈길을 의식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당신과 맞닥뜨렸지요.
어디서 보았을까....?
어디에서 많이 보았음직한, 춥고 황량한 겨울을 건너 온 초 봄, 한국의 한적한 시골길에서 보았을지도 모를 당신은 갓 돋기 시작한 짧은 머리털과 미처 가리지 못한 앙상한 몸매를 드러낸 채 떨고 있는 듯 했지요. 접착력 강한 거미줄에 온 몸이 칭칭 묶인 곤충처럼 가엾은 당신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나를 보았다면 지나친 감상이라고 하실 건가요?
그날 이후, 쭈욱 지켜봐 왔습니다.
어쩜 내 쓸쓸함과 외로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나만큼 외로웠을까요?
무언가 온통 빠져나간 듯한 그 상실감과 허전함 말 이예요.
어딘가에 내 중요한 무엇인가를 빠뜨리고 빈 몸으로 떠나왔다는 느낌.
그것들은 나를 망연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했지요.
당신도 그래 보였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 서서 먼 하늘에 공허한 눈빛을 던지던 당신도......
나는 당신에게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당신은 자신의 고통만 들여다 보고 있을 뿐 내 마음 같은 건 알려고도 하지 않은 듯 싶습니다. 누구든지 그렇지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아픔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거.
나 역시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당신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몰려드는 듯했습니다.
그 이후 당신 모습은 눈부시게 달라져 있었지요.
마치 이발소에서 갓 나온 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고나 할까요?
말끔하게 정돈된 머리, 하얗게 면도자국이 남아 있던 목덜미, 싱싱한 얼굴 빛, 조금은 수줍어했지만 온 몸에서 소리 없이 물살이 출렁이고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지요.
나날이 달라져 가는 당신 모습은 요란한 기적소리 울리며 출발하는 기관차처럼 힘차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눈이 부셔 가늘게 실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내심 부러웠습니다.
나도 저럴 수 있었으면......
그러나 어찌 보면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도 금할 길 없었지만 마땅히 축하를 보내야 할 일이지요.
같이 우울의 늪에서 헤맬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언젠가는 나도 이 늪에서 빠져 나와 경쾌한 삶을 살날이 있겠지요.
그러나 과연 그런 날이 내게도 있을 런지 자꾸만 자신이 없어집니다. 내 우울이 깊어서인지 당신은 요즘 나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눈빛입니다.
매번 멍하니 당신만을 응시하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요?
마당으로 나와 야외용 의자에 앉으면 내 눈은 저절로 당신에게 머물지만 때때로 나는 당신을 보는 것이 아닌, 내 상념들을 따라가곤 합니다. 물론 오랫동안 당신을 바라볼 때도 있습니다.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샘물처럼 솟구치기도 하고 때론 파들거리는 아픔에 저려올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푸욱 가라앉곤 합니다. 당신은 내 시야를 차단시키듯 고통까지 차단시키니까요.
가끔 내 속에는 알 수 없는 바람이 붑니다. 폭삭 내려앉을 듯 털끝만큼도 버틸 힘이 없다가도 불길처럼 불불 일어서는 어떤 기운에 하루종일 서성이기도 합니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 불길에 휩싸여 우울하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합니다만 때론 멍한 눈길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바라보곤 하지요.
나를 놓아버린 이 상태는 쫓아도 쫓아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날 파리 처럼 매우 귀찮고 성가신 것이지만 그 속에서 벗어날 길을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럴 때 오랫동안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염없이 당신 모습에 몰두해 있다가도 문득 다가가 손바닥으로 쓸며 만져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 있지 못합니다. 아니, 난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걸요. 다만 집안에서 당신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마당으로 나오면 그때 당신의 존재가 두 눈 가득 담겨오고 아! 하는 짧은 감탄사가 흐르지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는 당신.
내 마음의 위안이며 따뜻한 영혼을 지닌 당신.
끝없이 너그럽고 포근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요?
아니지요. 내 집 마당까지 날아 와 뒹구는 당신의 떨어져 나간 살붙이에 쓰린 눈빛으로 애처러워 하지만 가슴으로 온갖 새들과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들을 아늑히 품어줄 줄 아는 당신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성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조차 한 마리 새가 되어 당신의 어깨 위에 날개를 접고 싶은.
당신은 언제부터 그 곳에 계시기 시작했던가요?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 아니면 그 오래 전부터일지도......
바람결에 묻어나는 당신의 음성은 여름 날 빳빳이 풀 먹인 홑이불이 사그락거리 듯 상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래도록 당신을 보고 싶고 그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차분해지는 나를 느끼니까요.
그러노라면 언젠가는 당신을 닮아 가겠지요. 안으로 삭힐 줄 아는 그 과묵한 여유까지도......
아침이면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이슬 머금고, 햇살 환히 쏟아지는 한낮에는 풍성한 온 몸 정갈하게 닦아 내며, 노을 진 석양에는 슬픈 눈망울에 차라리 고개 떨구고, 밤이면 은색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달빛을 세례인 듯 고요히 맞고 있는 당신.
지혜로운 말없음표의 침묵으로 어지러운 이 세상, 묵묵히 견뎌내는 구도자 같은 당신, 당신은 누구세요?

(* 1996년 9월에 )


- '아침장미' 제8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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