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장례(葬禮)

2004.03.24 15:30

장태숙 조회 수:609 추천:45

무언가 사르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탁, 소리가 펄럭였다. 공기를 흔드는 마지막 저항, 망설임 하나 없이, 가슴 깊숙이 꽂힌 칼날 뽑아내 스스로 목을 치듯, 선명하게 거실바닥으로 투신하는 바싹 마른 양란 꽃의 얼굴들

한때
자신이 우주이던 꽃
세찬 격랑과 탱탱한 희망들
생의 중심을 지날 때
핏줄 속의 불티들
들끓듯 일어서
긴 꽃대 끝까지
끌어 올렸을
그 아찔했던 시간들의
현란(絢爛)
꽃잎에 주름 앉고
식은 살갗 버석일 무렵
사라지는 수분처럼
이승을 빠져나가는 생
그리고
눈물겹게 움켜쥔
죽음의 무게
놓는다.

물기 하나 없는 맑은 영혼이 날아 갈 듯 가볍다. 색깔을 지니는 것조차 욕망이었을까?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벼워지는 육신, 곧 바스라질 듯 가냘픈 너의 퇴색한 우주, 적막그늘에서 싸르르 통증을 일으키는 내 청춘이 바래가고 바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한 생애, 풍장으로 보내고 싶다. 맨발의 네 영혼

- '우이시' 2004년 4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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