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단풍처럼 붉어지고

2006.11.07 19:30

장태숙 조회 수:798 추천:53

<홀로 쓰는 편지>

            그리움은 단풍처럼 붉어지고
                  - 나의 아버지에게 -                              
                                                    


창밖으로 명주 같은 보드라운 가을 햇살들이 하늘하늘 떨어집니다.
세상으로 통하는 골목길에는 눈빛 환한 단풍잎들이 팜 나무나 종려나무들 사이에서도 계절의 흐름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은 점점 깊어 치마꼬리를 감아 쥔 10월이 모퉁이를 돌아가려 합니다.
11월이 다가오면 아버지, 내 그리움은 단풍처럼 붉어져 낙엽처럼 뚝뚝 떨어지겠지요.
유난히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호탕하신 웃음소리와 은빛 머리카락 흩날리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계신 그곳은 어떠하신지요? 지낼 만은 하신지요? 여전히 아침이면 작은 호수에 물안개 피어오르고 새들은 숲 속으로 날아드는지요?
몇 년 전에 아버지의 뜰에 심어 둔 동백나무는 누군가가 파 가버려 한동안 가슴이 짠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우이동 계곡을 아버지와 함께 내려오며 나누던 긴 이야기와 학교 기숙사까지 찾아 오셔서 같이 먹던 냉면과 첫 운전으로 내려간 고향 집, 큰 길까지 마중 나오셔서 걱정스레 오랫동안 기다리시던 모습...   떠나올 때도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계셨었지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다 축축하게 차오릅니다.
마음은 이미 아버지 손을 붙들고 있는데, 몸은 십년 넘게 살아도 어설프기만 한 이국의 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고국에 있을 때는 불현듯 그리우면 한 밤중에도 차를 몰고 아버지 계신 곳으로 달려가곤 했는데 태평양을 넘어 온 이곳에서는 너무 멀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버지
이번 아버지 기일에도 큰딸인 저는 아버지 곁에 가지 못합니다. 이 먼 곳에서 그저 아버지를 마음에 그릴 뿐이지요.
이 늦가을이 유난히 가슴에 젖는 것은 이맘 때 아버지께서 저희 곁을 떠나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이북에서 내려 와 자식 넷을 전부 출가시키고, 어머니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 혼자 쓸쓸히 저 세상으로 향하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날, 온 세상이 뿌옇도록 안개비가 내렸지요. 갈대 가득한 작은 호수에는 물안개가 자오록히 피어올랐고 질컥질컥하던 산길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 같았어요.
10여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갑자기 아버지의 부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아버렸지요. 그 밤길로 내려가던 고향 길...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고 운전대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어요. 아버지의 찬 이마에 손을 얹었을 땐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뜰 것만 같았는데...
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등성이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 온 이후에도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 몇 번이나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아버지 가신 2년 후, 저는 삶의 자리를 미국으로 옮겼지만 해마다 이때쯤이면 자주 가슴이 시립니다. 한동안은 일부러 때를 맞춰 고국으로 향하긴 했습니다만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세상사는 일이 어찌 제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일이던가요? 가족들이 전부 모이는 기일에도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제 마음이 서럽습니다.
지금쯤 아버지 계신 곳은 단풍이 낙엽 되어 풀풀 휘날리겠지요. 작은 호수의 물색은 더 깊을 것이고 호숫가에 그리움처럼 핀 갈대들은 미세한 바람결에도 은빛으로 반짝반짝 나부끼겠지요. 아마 산마루 위 해맑은 가을하늘에는 아버지 모습이 계실 것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내년 봄, 아버지의 묘지에 파릇파릇 잔디가 돋아 날쯤이면 한 번 찾아가 뵈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버지, 올 아버지 기일에 참석하지 못하는 큰딸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세요.
사랑합니다.


        강남시 11월호 '홀로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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