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3 12:17

안경라 조회 수:544 추천:42

   헨리 김 선생님은 원하던 중학교 영어교사를 하게 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비록 밤 시간대였지만 대학강단에 서고 싶은 꿈을 몇 년 전 이루게 되었다.
   50 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아기 갖기를 원하는, 나머지 그 한가지 꿈은 아직 미지수인 그분은 훤칠한 키에 미남에다가 매너도 좋고 목소리도 아주 근사하였다.  복음성가 가수와 결혼하여 커다란 개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 헨리 선생님은 같은 신앙인이자 나의 회사 손님이기도 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나의 소개를 좀 특이하게 해야 했을 뿐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아니, 내가 좀 특이하게 내 자신을 소개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나와 금방 친숙하게 된 헨리 선생님은 학교에서의 장난꾸러기 여학생 셜리가 선생님을 골탕먹이려다 보기좋게 들통이 나서 그 일 이후로 '뒤에 눈이 달린 선생님'이라는 별명이 붙어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꼼짝못하고 얌전하게 수업을 듣는다는 이런저런 학교 이야기를 이따금씩 들려 주시곤 했다.
   일상적인 삶의 이런저런 말을 전화로 주고받을 때가 아닌, 메모를 해야 한다거나 중요한 것으로 통화를 해야할 때, 나는 말의 속도를 늦추고 똑같은 말을 몇번 되풀이 해야만 했는데 그럴때마다 수화기의 저쪽으로부터 희미하게 탁탁탁 소리가 들렸다.  점자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꿈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꿈 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헨리 선생님의, 영어교사와 결혼과 대학강사의 실현은, 쉽게 이룰수도 있을 일반사람들의 평범한 꿈과는 결코 같지가 않다.  당신이 만약 온 세상을 다 소유할 듯한 한창의 나이인 고등학교때 야구를 하다가 야구공에 머리를 맞아 두 눈이 실명됐다면 어떠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겠는가?
   돌처럼 무거운 점자책을 들고 다니며 손끝에 온몸의 감각을 끌어 모아 하나 하나 이룰 수 있었던 어둠 속의 의지는 세상사람들이 이루었다하는 세속의 꿈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이미 이룬 것이기에 헨리 선생님의 삶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값진 것으로 남고있다.




<한국일보 '여성의 창'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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