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2005.07.05 13:06

안경라 조회 수:402 추천:37

   얼마전 R.P.V에 살고 있는 시 동인, H 한테서 편지가왔다.  그 편지는 간단하면서도, 바닷물에 빠져드는 돌처럼 무거운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었다.  '내가 불리워지고 싶은 이름이 잊혀지고 있는가, 새로이 내게 붙여진 이름들에 만족하고 있는가, 내게 불리워지는 많은 이름들중에 어떤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라는 하나의 주제에 부여된 허다한 이 갑작스런 질문들로 인해 그 편지를 받은 날 밤, 잠을 도통 이룰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처음의 이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얻어진 달콤한 이름, 아이낳고 불려지기 시작한 이름없는 이름, 등등... 이런 저런 구실을 모두 끌어들여 더 나열 한다면 한 트럭정도는 될 듯한 이름들.  나는 '이름'이라는 낱말의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국어사전을 펼쳤다.  <사람의 姓 아래에 붙여 그 사람만을 가르켜 부르는 일컬음>이라는 뜻 풀이를 보며 나 만을 가리켜 불리어지던 이름의 행방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찾는다고 되는 일인가.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얼마나 공허한가.  공존의 세상에서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없다면 외로워서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하기 전 푸르게 살아있던 석자 이름이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이름도 무슨 저승사자와 결혼을 하는지 서서히 호흡이 멈춰지고 있지만 "다 그런거지 뭐"하는 체념파에 속하고 싶지 않기에 아이 둘 낳고 어느덧 학부형이 되었어도 나란이 엄마가 아니, Mrs. Ahn이 아닌 내 처음의 이름이 불려졌으면 하는 바램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결혼을 해서 아이들 낳고 살다가 무슨 동창회나 있으면 그 때 그 모임에서야 여자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어머나! 미순아, 박경라, 선희야, 얼마만이니? 근데 혜숙이는 않 보이네?"하며 서로서로 반가이 불러주는 잊혀져 가고 있던 이름들이, 단비를 맞은 풀처럼 그 때 싱싱하게 살아난다.  
   처음의 이름이 불리어질 때 여자는 여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김춘수 시인도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는 이름을 통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 진정으로 존재하고 싶은 강한 의욕이 내포된 '꽃'이라는 시를 아름답게 읊지 않았던가.  하물며 여자임에랴.



<한국일보'여성의 창' 10월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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