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2006.10.05 14:04
창문을 두드리며 내리는 빗소리에 새벽잠이 깼다.
처음에는 아득히 먼 꿈결 속, 안개같은 소리로 그리고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가지 우는 소리로
끝내는 내 문턱까지 와 나를 깨우는, 심한 부서짐으로
우우거리며 나를 깨웠다.
언제 어떻게 오든 내겐 한없이 반가운 손님같은 비.
새벽비는 이르게 커피를 마시게 하고 하는 일 없이 부산한 아침이게 한다.
그래서 오늘같은 때면 영락없이 지각을 하고 만다.
그래도 조바심 느끼지 않음은 어디서 오는 여유와 배짱인지 모르겠다.
이따금씩의 그러한 이탈을 익살스럽게 즐기는 것은 아닌지...
쏜살보다도 더 빠르게 하루가 지나갔다.
어쩌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로인해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을 뒤돌아 볼 수 있었던 하루였을까.
글 한 줄 읽을 수 없었던, 시 한 편 읊을 수 없었던
'일'에 치여 바빴던 오늘은...
오늘 꼭 했어야 할 일 서너가지, 친구에게 우표를 붙이는 일,
고마웠던 사람에게로의 방문, 단골손님에게 연락을 취했어야 할 일...
기쁘게 해야 할 일들이 자꾸만 밀리고 있다.
하루의 끝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으로 오늘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걸까.
학교도서관에서 파는 몇 센트짜리의 음악 레코드와
이것 저것 필요한 책을 사온 주섭의 알뜰한 정성과
골동품같은 주판을 사서 왜 이런걸 샀느냐고 묻는 말에 재밌어서 샀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보고 느끼는 작은 기쁨, 이것이.
재미있어서 샀다는 말이 얼마나 웃기던지 철퍼덕 주저앉아
한바탕 웃어제꼈다.
스트레오를 고치는 그것이 단순히 음악소리만 잘 들리게 하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의 소리가 들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주섭은 알까?
그러한 모습에서 지금 내가 잔잔한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알까, 모를까.
콩나물의 버려질 것들이 티테이블에 있고, 먹다 만 오렌지,
아침에 빨았던 나란이의 양말과 바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는 자유속에서
타이타닉의 음악에 맞쳐 재롱떨며 춤을 추는 나란이를 보며
모든 걱정 사라지고 있음을 아이는 더욱 모를 것이다.
아늑한 시간이 자꾸만 단축되고 있다.
잠들 수 없다.
아담한 정원같은 우리의 공간에서 이러한 평안한 느낌으로는
시간이 귀중해서 잠들 수가 없다.
누런 모습으로 다 죽어가던 피이스 릴리가 꽤나 건강해져서
꽃 몽우리 하나 하얗게 올리고 있는 오늘 밤
그래서 또 잠들 수가 없다.
죽을 것 같았던 곳에서 결국은 깊이 숨겼던 비밀같은 꽃 하나
피워 올리고 있는 모습은 즐거운, 신비스런 자랑거리이다.
자랑하나가 조심스럽게 올라오고 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죽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 탓일까
콩나물을 또 다시 한 움큼 조그만 맑은 병에 꽂는다.
먼저 키운 노란 콩머리가 어느새 파랗게 변하고
그곳에서 애기싹이 다시 솟아나오고 있다.
신비한 성장.
온갖 생명에 대한 강한 이 집착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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