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신춘문예 당선 시 모음

2007.01.21 09:50

안경라 조회 수:1024 추천:44

■ 동아일보 - 개기월식 / 곽은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컨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 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리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심사평- 예??통하여 본심에 합류한 시들은 산문성이 농후하였다. 시는 다른 장르의 특징을 시적인 것으로 포용하여 그 장르적 영토를 변용시켜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 쓰기 방법은 시를 다른 장르, 산문에 복속시켜 버리게 되는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본심 작품들 중에서 세 사람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운성의 ‘황금나무 밑을 간다’ 외 4편의 시는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시각, 그에 따른 해석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거나 산문적 전개가 거슬렸다. 주영중의 ‘시조새’ 외 6편의 시는 응축된 이미지들의 전개로 하나의 국면을 조성하는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응모된 여타의 시들에서 읽을 수 없었던 낯설고 신선한 표상을 시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언술이 전개되는 중에 이미지가 비약하거나 소홀히 처리되고만 시들이 지적되었다. 곽은영의 ‘양철인형’ 외 5편의 시들은 치밀한 표현, 선명한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능숙하게 서사적 전개 속에 배치하는 형상화 능력들이 눈에 띄었다. 아울러 응모된 작품들 모두가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우리는 응모된 모든 시들 중에서 ‘개기월식’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하였다. ‘개기월식’은 정육점 여자, 살코기, 월식 중인 달과 아이의 요의와 배설이 중첩되거나 흩어지면서 먹고, 먹히며, 배설하는 풍경 속에 숨은, 생의 비의 하나를 그려내고 있다. 최승호 시인 김혜순 시인 (예심: 반칠환 권혁웅) ■ 문화일보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 심사평 - 당선작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외 네 편을 응모한 최명란씨의 작품들은 그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좋을 만큼 빼어난 것들이다. 탁월한 시적 형상화 능력과 적확한 언어 구사, 기발하면서도 활달한 상상력, 절제된 담백한 어조는 이 신인의 만만치 않은 문학적 내공을 짐작케 한다. 작품들은 주로 고된 삶을 다루고 있다. 노숙자, 보도블록 까는 청년, 꼬막 캐는 여자, 야간 대리운전사 같은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명란씨의 시들은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면서 어떤 안쓰러운 사실들의 풍경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대상과의 거리를 요구하는 그 풍경은 소외된 인생들의 어두운 풍경이기도 하지만, 심미적 안목과 감수성으로 걸러진 언어들에 의해 언어예술로 승화된 풍경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승규씨의 ‘대추나무 이력서’ 외 2편도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규씨의 시들은 맛깔스러운 언어들로 빚어낸 정감있는 이미지, 연기론적인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긴장을 늦추는 산문적인 요소들이 흠이었다. 고원효씨의 작품 중에서는 ‘미더덕의 맛’과 ‘코가 만들어지기까지’ 두 편이 관심을 끌었다. 말의 우연성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시적 전개 방식은 재미있고 독특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적 울림을 이끌어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응모자 모두에게 정진과 향상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황동규·최승호 ■ 한국일보 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입가에 물집처럼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쫓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 심사평 - 응모된 전체 작품 수를 고려하면 뜻밖에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절차가 지닌 독특성이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즉 예심위원이 본심을 겸하는 만큼 아예 예심 단계에서부터 본심에 임하는 각오로 작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11편을 두고 예심을 치러 아쉽지만 6편을 탈락시켰다. 이여명의 ‘돌을 쪼다’정철웅의 ‘철거민’이유훈의 ‘저수지에서 경전을 읽다’조인호의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이연희의 ‘장독하나 묻어두고’김두루의 ‘얼룩말’이 그 작품들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박희진의 ‘햇쑥’은 인고의 계절을 딛고 선 초봄의 여린 햇살처럼 따스하고도 빛나는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작품을 구조적으로 맵시 있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다소 서툴러 보였고, 또 소품에 그치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정지현의 ‘직선의 방정식의 일반형’은 곧고도 날렵한 음조를 지닌 의욕적인 목소리와 능란한 은유의 구사가 매력적이었지만, 아직은 저 수사가 소리의 의욕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보다 오랜 고민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드린다. 배호남의 ‘고래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작품이어서 오랜 습작과 훈련의 세월을 읽게 만들었다. 그 점은 함께 출품된 ‘사군자의 꿈’ 같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 한 편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심사위원들의 처지에서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해보였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오선희의 ‘꽁치’로서, 구조적 완결성에 있어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직 가장의 죽음과 구운 꽁치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삶의 엄숙함과 핍진함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러므로 순전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시길 각별히 당부 드린다. 당선작인 김두안의 ‘거미집’은 어떠한 과장된 수사나 현란한 말재간도 사양한 채, 차라리 어눌할 정도로 느껴지는 작고도 여린 목소리로 이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을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발음해내는 섬세한 내면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세상의 말들이 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 제출된 ‘입가에 물집처럼’도 저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높게 사 아울러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심사위원= 김기택, 황인숙, 김진수 ■ 조선일보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같아서 뼈째 씹어야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 심사평 - “활달한 상상력, 시어를 부리는 탁월한 능력” 언어를 통하여 삶을 투시하는 힘, 절제된 표현, 무엇보다 참신한 패기를 기대하며 심사에 임했다. 박민규의 ‘낙산’, 신미나의 ‘부레옥잠’, 한인숙의 ‘마이산’,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남궁선의 ‘폭설’, 김종훈의 ‘국소 마취’는 상당한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 중 박민규와 이윤설의 작품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올렸다. 박민규의 ‘낙산’은 시어를 다루는 솜씨와 객관적 서술력이 돋보였지만 신인의 패기보다는 모법답안이 주는 안정성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은 활달한 상상력과 살아있는 시어를 부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섬세한 묘사로 주제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감으로써 한편의 시로서 스스로를 지탱시키는 힘을 느끼게 했다. 이 작품과 함께 보내온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수준을 이루고 있어 그동안의 습작의 흔적도 알 수 있었다. 부드럽고 미화된 언어보다 정확하고 정직한 언어가 감동으로 직결된다. 언어 사용자로서 최고의 축복을 누리는 한 시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분들께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라며, 오래오래 깊은 향기를 터뜨리는 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시인·문정희·황지우 ■ 경향신문 서울 목공소 ---------- 양해기 굵은 팔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해 나무아래에 파묻은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껍질이 떨어져 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 테를 차례로 안아 낸다 얇은 나무판자에 땅-땅 못 총을 쏘아대는 사내의 얼굴이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땀은 가장 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 다닌 다 갈래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 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아이가 뛰어 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엮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 대구매일 우주물고기 ---------- 강경보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 세계일보 불가리아 여인 ---------- 이윤설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를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 부산일보 - 바뀐 신발/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 심사평 - 시들이 조금씩 어둡다. 시대가 어둡다고 시가 어두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고,고통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변화의 징후를 시에서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읽어 내렸다. 여섯 사람이 쓴 여섯 작품이 마지막까지 뽑는 이들의 손에 남았다. '기억에서 봄을 검색하다','몸빼','유마경변상도','없다,해돋이 광장에는','결혼기념일',그리고 '바뀐 신발'이 그것이다. 모두 남다른 수련 흔적과 작품 세공력을 숨기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주변의 구체적 일상에 충실하고자 한 점 또한 공통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천종숙의 '바뀐 신발'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에 뽑는 이들은 쉽게 동의했다. 신발은 흔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흔하지 않는 예각적 체험으로 되돌려 내는 눈매는 오랜 적공의 결과다. 첫 싯줄에서 마지막 싯줄까지 다소 둔탁하지만 거침없는 사색이 제 맵시를 잘 갖추었다. 함께 보낸 작품들의 수준이 가장 고른 점도 장점이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시가 먼저 변해야 한다. 이제껏 이고 다닌 나이와 경력은 지금부터 잊어야 하리라. 신인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모험의 세계로 즐겨 나아가기를 바란다. 시인 황동규·박태일·최영철 ■ 불교신문 눈발 날리는 마당/ 김운영 눈발 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으면요 마른 저녁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데요 발목 잃어버린 눈발은요 땅에 닿지도 못하구요 약한 한숨처럼 담벼락 위 아버지의 여윈 어깨 위 에도 말이지요 관절 절룩거리면서 아버지 뒤란으로 가시더니요 불쏘시개 송구나무 가마솥 물 끓이는데요 등겨같은 닭털이 공중에 몇 날아다녔나요? 오래오래 눈발이 아버지 빈 어깨에 배꽃처럼 쌓이면요 오래오래 가마솥 연기 마음의 暴政(장작불) 몸 밖으로 서서히 증발되고 있으면요 아버지 사발에 담아 안방에 어머니에게요 아버지 붉은 동맥 모세혈관 풀어 어머니에게 비는 견고한 용서 닭백숙의 용서를 말이지요 살과 뼈 허물어지는 解産처럼 맑은 국물 눈물 말이지요 어머니가 밤새 소리없이 우시는 날에는요 다음날 말없는 닭백숙 한 그릇 눈발 날리는 마당에서 말이지요. - 심사평 -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서해안과 호남지방에는 보름 가깝게 계속 눈이 내려 교통이 두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져 내렸고, 출하를 앞둔 양식장에서는 얼어 죽은 물고기들이 참혹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거기에, 황우석 교수 사건마저 가세해 2005년 12월은 나라 전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새해 첫 날 자신의 작품이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울 것을 바라고 문학의 외길을 정진해온 문학도들의 열정은 해가 갈수록 더욱 뜨겁고 웅숭깊어지는 것 같다. 그것은 불교신문 신춘문예 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1.5배 정도 증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좀더 자세히 살피면, 시와 시조부문에 270명, 단편소설 부문 55명, 동화 부문 88명, 그리고 평론부문 7명이 응모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응모자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연륜이 중앙일간지의 그것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불교신문의 특성을 고려할 때,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일반 독자의 관심이 점차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응모자 수가 늘어난 것에 비례해 작품의 수준도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이 각 부문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것은 우리 문학의 저변이 그만큼 넓고 깊어졌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무척 반가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응모작들이 다루는 제재나 주제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세계의 현상에 대한 추적, 혹은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철저한 구도적 자세 등 우리 문학의 일반적 특징과 유관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불교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제재와 주제를 불교 정신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불교 정신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스며들어야지 의식적으로 도드라지게 하려면 오히려 문학성이 훼손될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시와 단편소설, 동화 부문 당선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응모자 가운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우리 문학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한 심사위원은 우스개 소리로, “이런 추세가 한 십 년 계속되면 ‘오랜만에 남성 작가가 탄생했다’는 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시조 부문에서도 좋은 작품이 보였으나 시와 시조 가운데 한 작품만을 선정해야 했기 때문에 아쉽게 당선작에서 제외되기도 했고, 동화 부문에서는 최근 입적하신 큰 스님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제재와 낙산사 대들보로 만들어진 악기를 제재로 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단편소설은 불교적 제재나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았는데, 작위성이 강하고 구성이 다소 산만한 것이 흠이었다. 평론 부문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당선자를 내지 못하였으나, 수준은 상당히 진보한 것이었다는 평이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것은 개인에게 커다란 영광이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가차없이 잊혀지고 도태당하는 것이 문단의 현실이기도 하다. 당선자 세 분께 축하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 더욱 정진하셔서 우리 문학을 빛내는 큰 작가와 시인이 되기를 간곡히 희망한다. 장영우(문학평론가.동국대교수) ■ 강원일보 여행, 스무살의 열차/ 이병철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 심사평 - 동양전통은 말에 대해서 가혹하다. 그것은 말의 불완전함을 단정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말의 사건은 이미 종결처리된 사건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여질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예 말 자체를 버려버린다. 정말 냉정하고 과격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대적인 것만 표현할 뿐 절대적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노자의 사상은 도교적 미의식뿐 아니라 동양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 할 수 없다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심사하는 과정에서 노자의 미의식과 공자의 미의식 사이에서 고민했다. 말해지지 않음을 극복하는 사유의 깊이와, 말해야 하는 인식의 철저함이 아쉬웠다. 그것은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강한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시어의 독특함이 부족했고 시를 잘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들은 인식의 철저함에서 오는 성찰이 부족했다. 사유가 생각의 논리적 전개라면 철저한 인식은 사유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호씨의 `표류'는 끝까지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를 만들기에 급급해 내용이 형식을 얻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게 흠으로 지적되었다. 그 반면에 정경희씨의 작품들은 사유와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이미 기성시인이었다. 그러나 페이소스 가득한 스냅사진이란 혐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을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이병철씨의 `여행, 스무살의 열차'는 기성의 어떤 유행에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주목했다. 상황에 대한 묘사와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져 개인적인 삶의 어느 한때를 보편성 있게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크게 아쉬웠다. 시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말은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솔직함이란 지금의 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부정의 불온성이야말로 시를 시대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 만드는 근거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심사위원 / 함성호·서준섭> ■ 한라일보 개성집 / 김명희 내 유년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눈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둘러댈 붉은 변명들을 입 안 한 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도.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 가볍게 스치었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 심사평 -  공모 마감일까지 접수된 원고가 오백 편을 훨씬 웃돌았다. 지방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응모한 예비 작가들의 면면이다.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에서부터 칠순의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디 그뿐인가? 응모한 작품의 발신처가 전국의 경향각지를 총망라하고 있다. 영상 시대의 도래를 맞아 문자 매체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 일부 비평가들의 지적이 한참 어긋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문학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혼을 담아 꾹꾹 눌러쓴 시와 그 시들의 행간을 읽으면서 내내 행복했다. 많은 예비 작가들이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새겨둔 기쁨과 슬픔, 순수함과 아름다움, 아픔의 흔적과 덧난 상처들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를 아끼고 가까이 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 ‘시계대학병원이 있는 골목’, 박은영의 ‘놀러 와 주실 거죠?’, 조성란의 ‘동검도 폐교’, 이진화의 ‘귀뚜라미가 사는 동네’, 김명희의 ‘개성집’, ‘냅일물’ 등이다.  모두가 적지 않은 시력(詩歷)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성임의 시편들은 시를 포착하는 지점이나 감성에 있어서 기성과 다를 바 없는 수준작이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뜨거운 통찰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보다 깊이를 더한 그의 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싶다.  당선작인 김명희의 ‘개성집’은 우선 시의 깊이와 감동에 있어서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다. 한없는 가벼움이 미덕처럼 횡행하는 부박한 시대에 던지는 낮은 목소리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우열을 가늠하기가 힘들 만큼 고른 수준이었다. 물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당선자로 선정하면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이를 기화로 시의 밭을 일구어나갈 마음가짐이면 축하의 꽃다발을 받기에 앞서 마음의 죽비를 들어야 할 터이다. <김수열/시인> ■ 서울신문 - 아쿠아리우스 / 최호일... 당선 취소된 작품.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 심사평 -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선자(選者)들은 안타까웠다. 말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으면서도 사로잡힌 시가 안 보이니!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시답지 않은 시시덕거림의 중언부언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산문의 줄글체 등이 어지럽게 부조되어 왔다.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는 시상(詩想)을 펼쳐 독자에게 다가선들 그 반응은 불문가지이리라. 마치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말의 빈 포대자루를 한참이나 들고 서있었다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서도 임수련씨와 최호일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할까. 임수련씨의 작품에서 오래 묵힌 신뢰 같은 것을 맛본다.‘악어왕국’에서 보여주듯이 진술과 묘사를 교직시키는 적확한 비유가 삶에 스며드는 풍자와 제대로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동력을 내쳐 지탱해내는 인내를 잃었을 때,‘달리는 자전거의 실루엣’처럼 처음의 긴장이 어느새 허물어져버리는 시편으로 나타난다. 최호일씨의 경우, 응모 작품 전체에서 균질감이 살펴진다. 그만큼 습작의 강도가 굳셌음을 읽어내게 한다. 상상에 젖어든 시어의 활달한 운용도 그의 시편들을 오롯이 한 편씩의 완결된 서정으로 구축하는데 일조했으리라. 그 중에서도 ‘아쿠아리우스’는 태생의 별자리를 짚어 삶의 근원적인 갈증을 풀어내는 신화적 시선이 우물처럼 웅숭깊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시의 얼개를 어느 정도 아우를 줄 아는 솜씨가 평가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정현종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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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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