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으로 쓴 마지막 시, 오규원 (퍼옴)

2007.02.28 01:15

성영라 조회 수:510 추천:27

2007년 2월 2일 오규원 시인이 사망했다. 향년 66세.
  고인은 1991년 폐기종 진단을 받고 강원 영월, 경기 양평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해왔으며 최근 병세가 악화돼 입원했었다.
  지난 1월21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던 시인은 의식을 잃기 직전 상태에서 간병 중이던 제자 시인 이원 씨의 손바닥을 찾았다. 그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손톱으로 제자의 손바닥에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겼다.
  시인은 죽는 순간까지 시를 쓴다. 언어가 그의 정신을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처음 3행을 썼다가 한참 시간을 들인 뒤 마지막 한 행을 썼다"고 제자는 전했다. 스승의 빈소에 모인 제자들은 "마지막 시구는 2연의 첫 행일지도 모르지만, 4행을 한 편의 시로 편집하자"고 뜻을 모았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쓴 시는 아래와 같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왜 네 번째 행을 한 연으로 포함시켰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수업을 받은 제자들이 선택한 것이니 그의 의도를 잘 반영한 것이긴 하겠지만, 나로서는 두 연으로 나누는 게 더 보기 좋다. 하여간 두 연으로 나누면 이런 시가 된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장례는 오늘(5일) 오후 2시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진행된다. 많은 지인들과 동료 후배 문인들이 전등사에 모여 지난날을 추억하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할 것이다. 나는 방안에 앉아 가장 많이 알려진 고인의 시 <한 잎의 여자>를 읽으며 그를 보내기로 한다. 나고 죽는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버티시다가 파릇파릇한 물푸레나무 잎도 보이는 그런 따뜻한 봄날 가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오규원(1941~2007)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했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을 상자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오규원---한잎의 女子 1


       한잎의 女子 1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女
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
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
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
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
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있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오규원 시집
<사랑의 감옥>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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