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모래여자

2008.03.28 01:46

성영라 조회 수:279 추천:36

모래 여자 /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수상시 -


'모래 여자'는 차분하게 정제된 언어를 보여주는 시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마치 미라의 발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모래 여자의 존재를 조금씩 펼쳐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모래 여자가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를 비밀의 베일을 펼치듯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든 모습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그 모래 여자가 결국은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의 환유임을 알게 된다.

'모래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김혜순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김혜순적이 아니다. 김혜순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보다는 조용함이라는 생각에서 '모래 여자' 쪽을 조용히 선택했다.
[심사위원=정현종.김주연.황현산.최승호.이남호(대표집필 이남호)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9 단풍 이상태 2019.11.04 47
228 한국 장례장 예약 손님 이상태 2019.11.04 81
227 감사드립니다. 최영숙 2015.07.01 85
226 축하해요 정문선 2007.02.10 115
225 봄봄봄 file ,정해정 2007.02.18 121
224 반가워요 이윤홍 2007.02.07 123
22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용덕 2007.12.29 129
222 전통설 세배 이기윤 2007.02.16 131
221 반갑고, 기뻐요. 정순인 2007.02.10 132
220 더도,덜도 말고 file 달샘 2007.09.23 134
219 이집트 solo 2007.02.09 135
218 새벽 강 박영호 2007.02.14 135
217 찬란한 오월 미상 2007.05.15 136
216 감사합니다. 이 상옥 2008.08.02 136
215 축하해요! file 강정실 2007.02.15 137
214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이기윤 2007.12.11 138
213 어서와요 정해정 2007.02.05 140
212 지상에서의 며칠/나태주 금벼리 2007.05.22 140
21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성민희 2008.01.01 140
210 축하&환영합니다 석정희 2007.02.07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