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 서정주

2014.05.08 03:20

박영숙영 조회 수:1842 추천:27

벽(壁)/ 서정주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ㅡㅡㅡ덧없이 바래보든 壁 에 지치어
불과 時計를 나란이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긔도 저긔도 거긔도 아닌

꺼저드는 어둠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靜止한 「나」의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壁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 壁아

「벽」 全文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연의 ‘불과 時計를 나란이 죽이고’와 4연의 ‘壁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의 두 구절이다. 이 구절들은 ‘나’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는 부분으로 ‘나’가 처한 한계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의 한계 상황은 ‘벽’이라는 상관물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한계 상황이 ‘불과 시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시에서 ‘나’의 ‘벽차고 나가’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불과 시계’의 극복 의지이다. 여기서 ‘불과 시계’는 산술적이고 근대적인 인간의 이성과 자아의 유한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일종의 ‘빛’으로 해석되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나타난 ‘시계’라는 상징은 인간의 가치에 적대적인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근대적 시간이며 영원성을 상실하고 타락한 속된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계를 죽이는 시적 주체의 행위는 고대인의 속된 시간의 폐지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고대인에게 있어 파괴적이고 속된 지속으로서의 근대의 시간은 세계가 출현하고, 순수하고 강한 성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타게 되는 신화적 순간을 반복하기 위하여 폐지된다. 시 「벽」은 서정주의 영원성의 시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고대인의 시간관의 단초를 미흡하나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고대인의 시간의 폐지는 일종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여러 의례들을 통하여 실현되며,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성애의 자유, 오르기 등은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의 되돌아감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불과 시계를 나란이 죽이’는 살해의 행위는 바로 이러한 고대인의 ‘의례’를 표현하는 것이며, 2연의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은 그로 인한 前 우주론적 ‘혼란’을 의미한다.

‘불’을 죽이는 시적 주체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불을 끄는 것은 근대적 계몽 이성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우주론적 밤으로의 회귀를 듯하며, ‘꺼저드는 어둠속’과 같은 혼돈을 야기한다. 즉, ‘여긔도 저긔도 거긔도 아닌’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불’이 낮의 원리, 즉 빛으로서의 자아와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불’을 죽이는 시적 주체의 행위는 자아 중심적 지배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아를 ‘靜止’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계’의 죽음 혹은 근대적 시간의 폐지 이후에 나타나는 혼돈의 양상은 심리학적으로 ‘무의식’의 범람이며 이 시에서의 ‘靜止한 나’의 상태인 것이다. 시 「벽」에서 나타나는 불꺼짐으로서의 ‘無明’과 ‘정지한 나’와 ‘벙어리’의 동일시는 바로 이러한 자아의 퇴행과 관련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지한 나’의 상태란 는 자아가 전적으로 내향적이 되어 집단 무의식이 활성화되는 상태이며. 자아가 자신의 주도적 역할을 거두고 무의식에 내재된 통제력에 의존하는 일종의 자아의 ‘활동 중지’ 상태이다.
이 시에서 ‘불과 時計를 나란이 죽이’는 행위는 ‘근대적 시간의 폐기’와 ‘자아 중심적 지배 원리의 파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곧 ‘壁차고 나가’고자 하는 존재의 이행의 전 단계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서정주의 ‘육벽의 타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4연의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이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진달래 꽃이 붉게 타오른다는 이미지는 일종의 ‘잠재력으로의 회귀’에 해당한다. 그것은 불태움의 행위를 통해서 꽃이 재나 숯과 같은 ‘씨’의 상태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의 재생과 부활로서의 봄은 불에 의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시인의 인식이 바로 이 구절에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벙어리’의 원초적 육성인 목 매인 울음은 이러한 ‘새로운 시작’, 즉 봄의 예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연금술 식으로 말하면 최초의 질료로 흡수되어 다음의 새로운 봄을 기대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ㅡ서정주 시의 초기에 해당하는 『화사집』과 『귀촉도』는 연금술 작업의 세 단계에서 첫 단계인 니그레도에 해당한다.

이 니그레도 단계는 연금술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신적 변용, 즉 우주적 존재로서의 신적 인간(Gottesmensch)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이자 가장 위험한 단계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이 단계는 화학적으로 합일(Coniunctio)과 분리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리학적으로는 자아의 퇴행(Regression)과 죽음을 의미하는 단계이다. 이때의 죽음은 前 우주론적 혼돈으로의 복귀이자 제 1의 물질(Prima materia)로의 환원, 자궁으로의 회귀를 나타내며 동시에 부활과 재생의 예비 단계로서 통과제의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제 1의 물질의 환원과 분리 혹은 죽음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지만, ‘합일’은 니그레도의 선행 과정에 해당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 ‘합일’이 내재적으로 4 원소의 구성적인 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통합을 위하여 질료 전체가 모여 있는, 연금술의 전체 단계에서 ‘첫’ 합일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연금술에서 첫 합일로서의 대극의 합일(Coniunctio oppositorum)은 보통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같은 반대되는 요소의 결합이라는 비유로 나타나며 대극은 오누이 쌍, 건과 습, 온과 냉, 해와 달, 수은과 유황, 원과 사각, 물과 불, 휘발성과 무거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등의 여러 변이형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 합일이 연금술의 ‘천상의 결혼’과는 달리 각 원소들의 반목을 동반한 위험한 대극 긴장의 부담을 안고 있으며, 근친상간적인 성애(性愛)적 환상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첫 합일은 근친간으로 인한 죄가 있으며 부정을 남긴다. 이 합일 이후 발생하는 니그레도가 항상 어둠, 지옥, 죽음, 죄 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순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정주의 문단 데뷔작 「벽」은 그의 초기시에서 강렬하게 드러나는 주체의 니그레도적인 혼돈양상과 존재의 이행을 위한 ‘육벽의 타개’의 시도를 처음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작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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