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박형준

2014.03.29 20:35

박영숙영 조회 수:446 추천:45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소리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 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섬으로 떠나고 해당화 꽃은 가을까지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했다
  나는 공동우물가에서 저녁 해가 지고
  한참을 떠 있는 장관 속에서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에
  달무리 지는 밤길을 이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어느 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 꽃으로
  언제나 지고 나서도 빨간 멍 자국을 간직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내게 물려주셨다
  
  


  박형준을 시인으로 키운 것은 가난과 어머니와 옴팍집과 창호지에 스며드는 저녁 빛과 땅거미 내리는 들녘이다. 그의 시에는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원체험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령 “부뚜막에 앉아 / 장작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캄캄한 온돌 아래 / 깊디깊게 겨울밤이 지펴졌다. / 갓 낳은 송아지의 발바닥을 만지며 / 잠이 들었다. / 온돌의 불기처럼 부드러웠다. // 엄마소가 / 난산 끝에 죽은 / 기나긴 밤이었다.”(〈송아지〉)와 같은 시가 그렇다. 갓 낳은 송아지의 따뜻한 발바닥을 만지며 잠드는 체험은 도시에서 자란 소년들은 도무지 가질 수 없다.

사람이 아닌, 생명을 가진 어린 것의 온기는 ‘나’의 따뜻한 현전이 그냥 익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따뜻한 현전에 감싸여 있으며 그것과 연결된 것이라는 신비에의 깨달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익명의 있음은 아무것도 아님의 다른 말이다. 이 온기는 그 아무것도 아님에 살아 있음의 의미를 불어넣는다.
  
  〈멍〉에 따르면, 시인의 어머니는 함지박에 빻은 고춧가루를 이고 인근 섬들을 돌며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여름에 떠났다가 가을이 되어 돌아오는데, 섬들을 돌며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을 이고 밤길을 돌아오신다. 그렇게 벌어서 식구들의 입에 들어가고 자식들 공부를 시켰을 것이다.

고단한 삶이다. 어머니의 장사는 번창한 모양이다. 장사로 남긴 이문들이 살림살이의 주름을 펴고 여유를 갖게 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그 집 마당 한쪽에 해당화 한 그루가 심어졌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해가 질 무렵 공동우물가의 잔광 속에서 서성거리는 소년은 어른이 되고, 함지박 장사로 늠름하게 생계를 해결하던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었다. 팔순의 어머니는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사진을 아들에게 보낸다.

어머니의 삶은 해당화와 동백 사이에 있다. 해당화는 흰 꽃을 피우고, 동백은 붉은 꽃을 피운다.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라는 구절에 의하면 어머니는 붉은 동백꽃을 보러 유람을 떠나신 적이 없다.

그랬으니 동백이 그 붉은 꽃을 모가지째 뚝뚝 떨군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본보기다.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삶을 자기 것으로 향유해본 적이 없다는 말과 같다. 시인은 그런 사실을 어머니가 동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멍〉을 나는 꽃의 시로 읽는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 꽃은 얼핏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린” 팔순의 어머니와 겹쳐진다. 다시 늙은 어머니는 해당화 꽃 진 자리에 생기는 빨간 멍으로 전이 된다.

어머니는 동백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고, 동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동백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화사하게 피었다가 절정에서 모가지째 뚝뚝 떨어져 절명하는 동백의 화사하고 드넓은 삶과는 먼 삶을 살았다.

사람을 동백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눈다면, 이 어머니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박형준의 상상세계에서 꽃은 빛과 불을 머금은 현존의 상징이다.

“천길 절벽 아래 / 꽃 파도가 인다”(〈춤〉)라는 구절에서 절벽 아래에 이는 파도는 그 자리로 추락하는 어린 날것들에게 죽음의 자리다. 그런데 그 죽음으로 일렁이는 물결을 시인은 꽃 파도라고 한다. “올라가서 올라가서 이제, / 바람에 뒤척이는 꽃밭이 되어라”

(〈저녁 꽃밭〉)라는 시구에서 “바람에 뒤척이는 꽃밭”은 싱그러운 것들이 어우러져 이룬 장엄한 생명 경관(景觀)에 대한 은유다. 그 꽃의 이미지를 변주한 게 무늬다. “내 생이 저렇게 일시에 얼어붙을 수 있다면 / 나는 어떤 무늬를 내부에 간직할 수 있을까”

(〈얼음 계곡〉) 해당화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이 생긴다. 영혼의 즙액이 말라버린 자리에 생긴 멍은 빛과 불이 없는 꽃이며, 삶의 수고와 시련이 은밀하게 새긴 무늬다. 그 빨간 멍은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의 가슴에 피어 있는 꽃이다. 아울러 그 꽃은 “한 번도 동백을 보지 못”한 여인의 가슴에 새겨진 삶의 무늬다. 이 무늬야말로 혼탁한 진흙 세계에 피어나는 천지의 위대한 덕이 아닐까!

  박형준(1966~ )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공부했다. 1991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박형준의 첫인상은 순박한 시골 청년의 그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 나무에 올라 발자국을 낳고 싶다”(〈봄밤〉,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고 쓴다. 발자국을 낳다니! 그의 시에는 무수한 발자국들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 그가 걸어온 자취들이다. 이 발자국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속에 버티고 서서 머문 흔적이다.

박형준은 마당에 해당화가 있는 집에서 살았나 보다. 시인의 다른 시에도 마당의 해당화가 나온다. 시인은 어린 시절 한때 옴팍집에서 살았나 보다. 시인의 다른 시에도 옴팍집 얘기가 나온다. 가령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중략) /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계)가 / 속절없이 타올랐다”(〈地平〉(지평)), “소년이 사는 옴팍집은 / 불빛이 깊다.”(〈옛집으로 가는 꿈〉)라는 구절들이 그렇다.

집은 땅에 움을 파고 풀로 지붕을 엮어 만든 움집도 있고, 흙벽에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도 있고, 산기슭에 지은 오두막집도 있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기와집도 있다. 옴팍집은 움집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시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징용으로 끌려갔다 돌아왔나 보다. 아버지는 창호지에 저녁 빛이 스며들 무렵, 징용 가서 배운 일본 노래를 혼자 부른다. 그런 환경 속에서 소년은 미래의 시인으로 살았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모음' 박영숙영 2020.01.10 102
공지 우리나라 국경일 박영숙영 2015.07.06 341
공지 우리나라에는 1년 중 몇 개의 국경일이 있을까요? 박영숙영 2015.07.06 1633
공지 무궁화/ 단재 신채호 박영숙영 2015.06.16 275
공지 무궁화, 나라꽃의 유래 박영숙영 2015.06.16 710
공지 ★피묻은 肉親(육친)의 옷을 씻으면서★ 박영숙영 2014.10.19 442
공지 [펌]박정희 대통령의 눈물과 박근혜의 눈물 박영숙영 2014.06.14 413
공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 머리카락도 짤라 팔았다 박영숙영 2014.05.28 376
공지 어느 독일인이 쓴 한국인과 일본인 ** 박영숙영 2011.08.02 500
공지 저작권 문제 있음 연락주시면 곧 지우겠습니다. 박영숙영 2014.02.08 211
113 시집 잘 접수했습니다 김영교 2011.03.06 360
112 어머니의 동백꽃/도종환 박영숙영 2014.03.29 364
111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박영숙영 2014.06.18 367
110 술 한잔 / 정호승 박영숙영 2014.06.18 369
109 입주를 추카합니다 정국희 2008.08.22 374
108 [스크랩]ㅡ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박영숙영 2011.04.16 374
107 [스크랩]- 사자와 누 이야기 - 박영숙영 2011.06.10 374
106 봄의 시모음/ 노천명 외 박영숙영 2014.05.14 375
105 너도밤나무 /꽃말 : 당당한 자신감 박영숙영 2014.02.07 379
104 경상도 할머니 한분이 /유심조 박영숙영 2010.09.18 379
103 내 사랑은/문정희 박영숙영 2014.05.08 381
102 스크랩 ㅡ마음을...... 박영숙영 2011.02.28 382
101 ** 웃음과 건강** 박영숙영 2011.04.16 384
100 [펌]사랑의 노래 /신경림(시와해설) 박영숙영 2014.06.18 384
99 곡시哭詩 / 문정희 박영숙영 2019.02.13 384
98 ★♥보람된 “한가위”맞으소서! ♥★ 이기윤 2008.09.08 385
97 예배의 참뜻/법정 박영숙영 2010.12.10 385
96 [스크랩] ㅡ7 학년 8 반. 조야.. /유심조 박영숙영 2010.12.13 386
95 환영합니다 노기제 2008.09.09 392
94 팬티 / 임보 박영숙영 2014.02.07 393
93 풀꽃들 시위 썬파워 2009.06.30 396
92 2011년의 나의 좌우명 박영숙영 2010.12.28 396
91 스크랩 ㅡ행복 ? 박영숙영 2011.02.28 398
90 축 성탄 김동찬 2008.12.25 400
89 소경의 등불 / 탈무드 박영숙영 2012.03.22 406
88 반가웠습니다, 성영라 2009.08.08 409
87 [스크랩] 얼굴이란 박영숙영 2011.02.28 410
86 [스크랩] 어느 부부의 슬픈 이야기 박영숙영 2011.04.24 412
85 즐거운 추석 되십시오 정정인 2008.09.12 413
84 얼마나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 박영숙 2009.07.31 417
83 어떤결심 /이해인 박영숙영 2010.12.09 423
82 축하합니다. 박영호 2008.12.25 425
81 늦가을, 단풍도 국화도 익어가고.. 은방울꽃 2009.11.01 427
80 중앙일보 <문예마당>에 박영숙님의 詩 file 이기윤 2009.06.22 429
79 ♥ 입주 환영 축하!!! ♥ 이기윤 2008.09.08 430
78 믿음, 소망, 사랑.. 은방울꽃 2010.01.18 432
77 새 술은 새 부대에/ 방문 감사 애천 2009.12.24 438
76 잘 받았습니다. 오연희 2008.11.26 440
75 성탄절의 축복 장태숙 2009.12.24 445
» 멍 /박형준 박영숙영 2014.03.29 446
73 감사합니다 ^^* 백선영 2009.08.07 452
72 행복 썬파워 2009.05.31 456
71 “응” / 문정희 박영숙영 2014.05.08 457
70 [스크랩]웃음과 건강 이야기.... 박영숙영 2011.04.16 458
69 잊혀진 여자 / 로랑 생 박영숙영 2013.02.15 458
68 매미소리 난설 2009.08.09 459
67 [스크랩]ㅡ탈무드/유대인의 3 대 명언 박영숙영 2011.04.16 459
66 씨뿌리는 법칙 남정 2011.02.24 464
65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 정호승 박영숙영 2014.06.18 465
64 방문 감사 문인귀 2009.09.02 468
63 미주한국문학켐프 한마당 박영숙 2009.08.23 475
62 4월 愛.. 은방울꽃 2011.04.12 477
61 나는 엄마의 어린 딸 / 어머니에 관한 시 모음 박영숙영 2014.05.14 478
60 Merry Christmas~! 이기윤 2011.12.20 481
59 안녕하세요. 은방울꽃 2009.10.03 484
58 ♧♡ 웹문학동네 입주 황영합니다♡♧ 잔물결(박봉진) 2008.09.09 485
57 문학캠프에서 성영라 2009.08.24 485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57
어제:
94
전체:
887,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