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물시’ 부분)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계절이다. 서점에 깔린 수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의 시집을 집었다.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 세상을 향해 늘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낸 문정희 시인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어떤 남다른 메시지를 담았을까? 시인의 새로운 육성이 궁금했다.


“여성”  

문 시인의 창작열은 긴 세월에 걸쳐 이어져왔다. 고등학교(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고 여고생으로서는 최초로 첫 시집 <꽃숨>을 발간했고 1969년에 시인 서정주와 박목월의 추천으로 문예지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날리던’ 문학소녀였던 그의 열정은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나라 사회 구조상 여자들은 결혼과 출산을 하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 시를 쓰고 있다는 자체에 그는 성공의 의미를 둔다.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그는 ‘호기심과 겸손함’ 이라고 답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공부하고 또 공부하며 문학에서의 근본인 읽기와 쓰기를 끊임없이 연마했다. 1982년 두 아이를 데리고 뉴욕에서 유학한 것도 인접예술장르와 세상에 대한 눈을 넓히고 소통의 두려움을 떨쳐 한 단계 성숙한 시인의 길로 나아가게 된 계기였다.

“뉴욕에 있다 보니 우리나라를 나무가 아니라 숲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더라구요. 우리나라가 세계화되고 의식구조가 글로벌화 되니 나의 시세계도 청승맞음이나 우리만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좀 더 보편적인 정서에 노출되었던 것 같아요. 귀국해서는 사회 민주화와 함께 억압받는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남성”

이 쯤 해서 지난 학기 ‘시문학’ 수업에서 들었던 ‘문정희: 에코페미니즘(eo-feminism)적 시세계’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이 시대의 생명파괴를 문제 삼는 생태학과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한 단계 발전된 형태가 에코페미니즘이다. 즉 페미니즘이 학문적 갈래로서 흑인과 백인 또는 종교적 차별처럼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일종의 인권 운동에 해당한다면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차별을 더 큰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명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자신의 문학 사상에 대해 “저는 무작정 여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본래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그것을 문학의 테마로 삼아온 것이지요.” 라며 설명했고 “여성성 안에는 대지(大地)적인 무한한 생명력이 있는데, 거기서 여성의 본질을 찾을 수 있어요.” 라고 덧붙였다.

그의 시집 중에는 남성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남자를 위하여>도 있다. 용감함을 기대한 나머지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식으로 제약하고 있는 게 현실인만큼 남자들을 그런 사회적 억압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자와 남자는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서로를 무작정 공격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차원에서 남자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를 썼다고 한다.


문 시인은 요즘 빈번한 성폭력 성범죄 문제에 대한 지적도 했다.

“많은 남성들이 성에 대해 야성적이고 동물적인 것이 남자다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길들여짐의 문제에요. 여성성 남성성 모두 아름다우며 서로 아껴야해요.”

호랑이 눈썹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중략) 내가 가끔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 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있던 신사임당의 우아한 그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길 바란다// (‘딸아 연애를 해라’ 부분)

  
“시언어”

문 시인에게 좋은 시란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고 독자와 소통이 불가능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좋은 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먹어’야 한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집념 또한 대단하다.  문 시인은 책을 ‘미친 듯이’ 읽는다며 최근 읽고 있는 시집을 소개했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와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틀리메르의 시를 읽고있는데 두 시인 모두 노벨문학상 수상 이력이 있는 세계적인 시인이지요. 국내 시인도 여럿 좋아해요. 진은영 시인은 가볍지 않고 깊이가 있어요. 김선우 정끝별 시인도 참 좋아요. 사실 좋아하는 시인은 정말 많죠.”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곧 삶이다. 처음 시를 시작한 것이 53년 전부터라고 하니 생애를 시와 함께한 셈이다. 온 감각을 열고 관심을 시에 두고 있으면 신문을 보는 것도 TV를 보는 것도 모두 시가 된다. 걷다가 길에 서서 펜과 종이를 꺼내 메모를 남기는 일도 다반사다. 시를 쓰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고 기분도 우울할 정도란다.


달콤한 가을 햇살이 비치는 서울 강남의 한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시집과 더불어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다산책방)도 14년만에 출간했다. 지난 2011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카 포스카리 대학이 주관하는 예술가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3개월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머물며 <카르마의 바다>를 썼다. 카르마(carma)란 불교용어로 업보(業)를 뜻한다. 카르마와 바다는 어떤 관계일까.

  
“물”

“사람이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물을 마시고 그것이 내 몸속에 들어가 나의 슬픔과, 감동과, 사랑과 융화되면서 눈물로 나오기까지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한편으론 수세기가 담겨있다고 할 수도 있죠. 물이 몸에 들어가고 또 나오고 그것이 강으로 흘러가 바다가 되고 또 생명수가 되었다가 다시 눈물이 된다는 점에서 물의 카르마는 대단해요.”


43년간 시를 써온 그에게 물은 익숙한 소재였다. 스승 미당 서정주의 시를 물의 이미지로 해석해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물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해왔고 오랜 기간 내공을 쌓아온 저력이 물과 언어의 만남을 빚어냈다. “물은 우리 몸의 70%를 이루고 있고, 지구 역시 물로 뒤덮여 있지요. 그리고 물은 곧 생명이에요. 화성에도 물이 있느니 없느니 궁금해 하는 것도 생명과 연관되기 때문이에요.”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언어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부자가 돈도 잘 쓰듯이 언어의 용량이 큰 부자가 시를 쓸 때 꺼낼 언어가 많아진다. 다독(多讀)과 더불어 좋은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중요하다. 몸에 나쁜 음식 가려내는 것처럼 책도 유기농인지 불량식품인지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문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미래는 밝다. 인간은 감각적이고 마음이 동(動)하는 것에 반응하며, 늘 새롭고 세련된 표현을 동경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손을 얹어 봐요.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지면 그건 시의 영원함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는 인간인 이상, ‘시’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언어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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