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시 해설

2014.05.08 03:57

박영숙영 조회 수:2979 추천:29

사랑만을 위해 꿈꾸는 완전한 고립



―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이 시는 5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노래, 사랑을 위한 노래이다.
흔히 사춘기(思春期)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부르는, 사랑을 위한 '소망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쉽고 평이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화자는 줄거리를 어렵게 이끌어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일기장 한켠에 적어두고 싶은 비망록(備忘錄)처럼 화자는 숨김없이 솔직한 감정들을 쏟아놓고 있다.

화자는 시라는 구조나 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대신에 감정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맡긴다. 화자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얗게 눈이 덮인 겨울, 사람들의 감탄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변해갈 때에도 화자는 자신이 설정한 고립의 자리, 즉 '동화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도 않은 상태이고, 화자가 눈부신 고립을 꿈꾸며 한겨울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미완성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못 잊을 사랑을 생각하며 미완성이나마 한바탕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다섯 개의 연을 따라 화자가 부르는 연가(戀歌)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자가 그리고 있는 동화의 나라에서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아도 좋으리라.

먼저, 첫째 연에서 화자는 하나의 꿈을 꾼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꿈은 장난삼아 꾸어보는 꿈일 수도 있고, 현실의 외로움을 타개할 운명의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볼 때, 진지하고 절박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절박함은 화자의 톡톡 튀는 '끼'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대뜸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어한다.
화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삶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을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뜻밖의 폭설이다. 화자는 구차하게 계획된 삶보다는 운명처럼 묶여 돌아가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뜻밖의 폭설이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묶여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뜻밖의 폭설을 기대하고 있지만, 화자가 설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화자에게 있어서 폭설은 결코 '뜻밖의' 것이 될 수가 없다.
화자가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한계령을 넘는 시간적인 배경이 한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으로 설정된 한계령은 겨울철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리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화자에게 못 잊을 사람이 있어서 함께 고개를 넘는다면, '뜻밖의 폭설'이 아닌, 처음부터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일상적인 폭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화자는 능청스럽게도 '뜻밖의 폭설'을 운운하며 자신이 꿈꾸는 사랑을 색다르고 운명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4행 이하에서 화자는 폭설을 만나 벌어질 제반 상황들을 소개한다.
가장 객관적인 보도 역할을 하는 뉴스들은 앞다투어 기록적인 폭설을 알리고, 쌓인 눈 때문에 자동차들은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야단법석을 피운다.
그러나, 7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자는 그 무질서한 현장 속에서도 은근히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
그 상황이 좀더 악화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 인간의 힘으로는 얼마간 극복할 수 없는 그 자연이 주는 한계를 못 이긴 척 받아들이며 묶이고 싶어 안달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화자는 다른 사람들의 불편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을 위한 짜릿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2연은 화자의 작은 소망이 좀더 구체화되고 있다.
그(혹은 '그녀', 이하 '그'로만 표기)에게 고립은 오히려 눈부신 것이다.
그가 꿈꾸던 대로, 모든 것들이 눈 속에서 단절되어 오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동화의 나라이다.
그가 꿈꾸었던 대로 모든 일들이 척척 풀려나가는 행복한 나라이다.
이제 화자가 꿈꾸는 것은 물리적으로 그의 발이 묶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운명이 묶이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소망은 못 잊을 사람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황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악한 상황을 빗대어 창조적으로 사랑을 만들어나가려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을 꿈꾸고 사랑만을 생각하는 화자의 지고한 사랑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3연에 들어서 화자는 날이 어두워지자 하얗게 쌓인 눈에 취해 감탄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공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이제 저마다 두려움의 모습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지만, 그럴수록 화자는 그 시간이 신나기만 하다.
그가 꿈꾸던 완전한 고립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도 도리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헬리콥터가 출동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하늘을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향해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눈 속에 꼭꼭 숨어 그 고립의 순간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헬리콥터가 인명 구조를 마치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야생의 새들과 짐승들을 위해 먹이를 뿌릴 때에도 구조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4연은 3연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고립의 상황 속에 남아 있을 것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산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나무들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 역시 시퍼렇게 살아 있다.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생명의 힘이다.

전쟁터에서 젊은 군인들의 심장을 향해 포탄을 퍼부어 대던, 무섭고 무자비하던 헬리콥터들이 이제는 역할을 바꾸어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사람만이 아닌 야생의 동물들에게까지 자비롭게 일용할 양식을 뿌려줄 때에도 화자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다.주는 인위적인 혜택을 거부하고, 화자는 자연이 가져다 준 운명, 즉 폭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자신에게 닥쳐온 폭설이 결코 시련이나 아픔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축복의 순간을 즐기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몸둘 바를 몰라하는 화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진정 그 사람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 우리의 삶 속에서 뜻밖에 찾아오는 아픔과 시련은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시험하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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