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팍한 할망구(옮겨온 시)

2007.09.03 15:13

성민희 조회 수:239 추천:27

올해도 어김 없는 연례 행사로 양로 병원을 찾았다. 갈 때마다 담아오는 풍경 덕에 며칠 간이 우울해지는 게 싫어 가고 싶지 않지만. 단체에 몸을 담은 이상 책임이다 싶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는데. 역시나 올해도 휠체어에 아기처럼 앉아서 손뼉 치던 노인들의 모습이 계속 머리 속에서 나를 붙들고 있다. 민둥산의 황토 흙처럼 듬성듬성 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 있는 발간 살갗들.  폭 패인 양볼 사이 오물오물 사탕을 녹이는 틀니. 반갑다고 잡아주는 손가락의 가는 떨림. 초점 흐린 눈 깊숙이 묻혀 있을 그들의 한 세상을 생각해보니 가슴이 아린다.
언젠가 친구가 보내준 시가 생각나서 옮겨본다.


스코틀랜드 던디 근처 어느 양로원 병동에서 홀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의 소지품 중 유품으로 남겨진 이 시가
양로원 간호원들의 의해 발견되어 읽혀지면서, 간호원들의 가슴과
전 세계 노인들을 울린 감동적인 시다.
이 시의 주인공인 '괴팍한 할망구'는 바로 머지않은 미래의
우리 자신들 모습이 아닐런지...............................

~~~~~~~~~~~~~~~~~~~~~~~~~~~~~~~~~~~~~~~~

[괴팍한 할망구]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원 아가씨들...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요.

저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초리마저도 흐리멍덩한 할망구일 테지요.

먹을 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기나 하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나에게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 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 할 줄도 모르는 것 같고
늘 양말 한 짝과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기만 하는 답답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 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지는 '나' 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제발...
나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 넘기는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줄게요.

저는 열 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스무 살의 꽃다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랍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새 스물다섯이 되어
아이를 품에 안고
포근한 안식처와 보살핌을 주는
엄마가 되어있답니다.

어느새 서른이 되고 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제 품에만 안겨있지 않답니다.

마흔 살이 되니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
아이들의 그리움으로 눈물로만 지새우지는 않는답니다.

쉰 살이 되자 다시금
제 무릎 위에 아가들이 앉아있네요.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암울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남편이 죽었거든요.
홀로 살아갈 미래가
두려움에 저를 떨게 하고 있네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젊은 시절 내 자식들에
퍼부었던 그 사랑을 뚜렷이 난 기억하지요.

어느새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 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자리 잡았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 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 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 가 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봐주세요.
제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번만 바라보아주어요.
'나' 의 참모습을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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