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여인 메르세데스 소사

2009.11.02 08:51

성민희 조회 수:579 추천:29





흐르는 곡 : 비올레따 빠라가 작사, 작곡한 "생에 감사 드립니다"(Gracias a la Vida)


뚜꾸만의 딸 메르세데스 소사


 혹독한 군부통치와 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을 상징했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출생했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이 콜롬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꼭 2주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소사가 출생한 '뚜꾸만'(Tucuman)은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포한 곳이기도 했다. 뚜꾸만은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전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의 본산으로 음유시인 '아따우알빠 유팡키'(Athaualpa Yupanqui)가 소년시절을 보내며 인디오 전통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확인하고 정신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곳이다.

 소사가 출생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소사가 평생을 걸쳐서 걸어가게 될 '자유를 향한 여정'을 예감하게 된다. 소사의 조부는 께추아족 인디오였으며, 조모는 프랑스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누이 '코차'가 푸른 눈을 가진 반면, 소사는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 그대로다. 전통 춤을 가르치는 강사로 생활하던 소사는 1965년 코치킨 포크 페스티발에서 안데스의 전통의상을 입고 안데스의 전통북인 '봄보'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페스티발에서 그녀를 눈여겨본 필립스사는 그녀와 첫 음반 계약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설은 시작된다.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뮤지션들이 대부분 싱어송라이터였던 것과 달리 소사는 작곡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사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누에바 깐시온의 최고의 해석자로서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와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의 아리엘 라미레즈와 레온 히에코,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파블로 밀라네스 그리고 브라질의 밀톤 나시멘뚜와 쉬쿠 부아르키 등 소사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들의 노래는 마치 소사 자신의 말과 음악인 것처럼 완벽하게 해석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타 파라의 'Gracias a la vida', 아따우알빠 유팡키의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빅토르 에레디아의 'Razon de vivir'(살아가는 이유) 등 누에바 깐시온의 스탠더드가 되는 노래들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부독재시대에 벌어진 '더러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실종자를 낳은 암울했던 아르헨티나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물론,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는 방송될 수 없었다. 소사는 비밀경찰이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대중 앞에서 노래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매순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사는 'Todo Cambia'(모든 것은 변한다)에서 "모든 것은 변합니다 /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 생각하는 것도 /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고통 당하는 민중들과의 굳은 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번역을 필요치 않는 노래

 노랫말의 의미가 중요한 누에바 깐시온 가수인 소사에게 '언어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소사의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목소리에 있다. 소사의 목소리는 그녀가 펼쳐온 음악의 정수였다. 소사의 목소리는 노랫말이 담고 있는 정서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소사의 목소리에 신들리듯 빨려들어 여느 음악 공연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소사의 목소리는 놀랍게 변화한다.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들려주기도 하며, 때로는 신념에 찬 우렁찬 외침을 거침없이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웃음을 담기도 하며,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이웃들의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소사의 천부적인 목소리는 그녀의 전인격과 일치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소사의 노래는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노래로 전 세계인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곧 목소리이며 이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의 전인격뿐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을 한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인 판초를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삶과 음악을 일치시킨 위대한 가수에게 바치는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었다.

'희망'을 노래하기 위한 끝없는 여정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1979년 1월, 군사정권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남편과의 사별 직후에 당한 일이었기에 그녀에게 아르헨티나를 떠난다는 것은 뿌리로부터 찢겨져 나가는 처절한 아픔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음 둘 곳 없는 쓰린 망명 생활 속에서 소사의 아티스트적 면모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시기에 소사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음악들을 실험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데스의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포크로리카'(Folklorica) 가수라는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 록과 재즈의 요소까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음악적 뿌리는 잊지 않았다.
  드디어, 소사는 1982년 망명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다행스럽게도 소사가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몰락을 맞이했다. 귀국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음악 생활의 초반과 이후에 중요한 도움을 주었던 아리엘 라미레스와 아르헨티나의 밥 딜런이란 별명을 가진 록 가수 레온 히에코, 찰리 가르시아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극장을 가득 메운 아르헨티나 국민들과 더불어 소사의 귀국과 아르헨티나의 민주회복을 축하하는 감동과 환희의 축제가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의 민주회복과 더불어 소사의 레퍼토리는 사회적, 지역적인 것에서 범 아메리카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스팅, 닐다 헤르난데스, 프란시스 카브렐, 밀톤 나시멘뚜 등 세계적인 대중음악 스타들과의 공연과 앨범 작업도 이루어졌다. 또한 음악 생활 내내, 자국의 작곡자들과 아티스트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소사의 노력도 이보다 한층 활발해져 아르헨티나의 작곡자들의 작품을 노래한 앨범 [Vengo a ofrecer mi corazon(내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을 발표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97년까지 활발한 앨범 활동과 공연활동을 펼치?소사는 오랜 동안 감춰져 있던 정신적 상처로 인해 쓰러지고 만다. 망명 기간부터 쌓여왔던 불안과 고통이 소사의 육신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무려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극심한 탈수현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오간 끝에 소사는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체중이 무려 30Kg이나 줄었지만, 반년동안의 고통 끝에 1998년 기념비적인 앨범 [Al Despertar(잠에서 깨어나)]를 발표하여 평론가들과 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2009년 10월 4일 오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요. 지난 9월 18일부터 숙환인 신장과 폐 질환으로 집중 치료를 받아왔으나 결국 ---- 소사를 사랑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국회로 옮겨진 그녀의 시신에 마지막 작별을 고했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시내 샤카리타 묘지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Elisabeth Fernandez)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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