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고마운 사람

2008.01.24 00:44

강학희 조회 수:23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소회:

이제 저는 한달 후면 현역에서 떠나 잠시, 또는 어쩌면 오래 이 곳을 떠나있게 될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떠나기 전에 함께 나눌 시하나 준비해보라고 하실 때 문득 
강은교시인의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나이가 든다는 건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것들이 저절로 보이고 알아지는 시간이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험블하고 조금은 더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꽉 끼었던 
새 신발이 어느 덧 편안히 발을 감싸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개인적
으로 이 시간이 "살면서 한번은 행복에 대해 물어라"를 쓴 독일 철학자 빌헤름 슈미트가 
말하는 "행복하게 늙어가는 법"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동안 버클리 문학이란 새 신발 속에 발을 넣고 비비던 그 기억들과 
냄새와 흔적들이 많이 그리워지겠지만, 제 나름의 사랑은 더 깊어지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아, 그 땐 몰랐어..." 라고 후회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꽃속의 꽃 문학을 품고 아주 많이 행복했었으니까요. 이제 조금은 
토실해진 버클리 문학 당신을 사랑합니다.  멋진 당신 사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고마운 사람 / 강학희

얼마 전 심통스런 사람을 만났다
자기 일도 아닌 일에, 그 것도 별 것 아닌 작은 일을,앞뒤 어떻게 됐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끼여들어 자기 생각을 주입하느라 남의 말을 막으니 남들 앞에서 화를 내어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어 참고 또 참다 돌아오니..., 집에 와서도 밤새 속이 뒤집히고 명치 끝이 
아파 또다시 숨이 콱콱 막혔다.


아-아- 왜 옛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심통스럽다하는 지... 오랫만에 심통心痛이란 것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그래, 바로 이렇게 남에게 심통을 느끼게 해서 심통부리는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구나! 혼자서 무릎을 치면서 피식 웃고나니, 씩씩거리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 
앉았다. 그리고,

마침 임진년 정초를 지난지 얼마되지 않아, 특별히 이 해에 어떤 좌우명이나 계획을 세운 
것이 없기에, 올해에는, 아니 이제 정년이 삼년 남았으므로 삼년계획으로 '심통내지 않는 
사람'을 정년까지의 좌우명으로 삼자 결심해 본다.

이즈음 주위의 정년퇴직한 커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어휴, 난 남자들 마음이 
이렇게 콧구멍만하고 답답한지 몰랐어요. 왜 그리 자꾸 삐치고 따라다니며 시시콜콜 잔소리
하고 그러는지... 전에 일할 땐 몰랐는데 종일 함께 있어보니 참 힘드네요." 하는 소리들을 
많이 한다.

아마도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은퇴하면서부터 젊음으로 부터의 격리, 사회로 
부터의 격리, 특히나 자녀들로 부터의 격리로 더 많이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남자의 경우에는 활발한 사회생활을 할 때의 가장의 권위도 없어지고, 신체적으로도 
왕성하지 못한, 혹은 왕성하지 못할까 봐 불안스런 마음이 한몫을 거들어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때쯤이면 대부분의 기혼여성들은 이미 아내로써, 며느리로써, 엄마로써 할머니
로써 일찌거니 속이 다 미어지고 넓혀져 자잘한 불편은 이미 도통한 시기여서 더 더욱 부부
간의 괴리가 눈에 뜨이게 휜히 보이는게 아닐른지.

그러면, 편협하고 심통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늙어가려면 (자연스러움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테니..)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생각하다보니, 그 건 심통스러움의 반대를 지향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것은 아마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기꺼운 눈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하는 것, 결국 사물이든 사람이든 상대를 사랑해야하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한다.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마음에 들게 되지 않을 테니까.

밤새 이 생각 저 생각 뒤척이다 보니 마치 안꼬없는 단팥빵처럼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더불어 혹 나도 오늘 사랑은 빼먹고 난 
빈 마음으로 그를 바라 보았기에 이토록 심통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오늘 나를 다시 점검하게 하고, 나를 추스리게 한, 내가 만난 심통스런 
사람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나이 만큼의 후덕함을 쌓으며 살아, 나도 
남에게 심통을 느끼게 하는 일은 하지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옹크렸던 몸과 마음을 쭉 펴고 '오늘은 타인을 통해 나의 얼굴을 다시 한번 비추어보게 된 
날이었구나!' 심통스럽지 않고 넉넉한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며 잠을 청한다. 누구를 만나도 
내가 먼저 그를 이해해보리라 주문처럼 외면서...,

설령 심통으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그였지만, 그를 위한 기도 한자락 깔고나니 
마음이 평안해지며 눈이 스르르 감긴다.다음에 그를 만날 때는 미움이 아닌 웃음을 달고 
눈빛을 마주하리. 나를 배우게 한 감사한 사람아 고맙다, 그대도 부디 이 밤 편히 주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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