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ke Tahoe에서 外

2011.03.26 08:43

정용진 조회 수:256 추천:21

Lake Tahoe에서

청산에 백설이 내리니
하늘과 땅이 설국(雪國)이 되었구나.

산은 설산(雪山)
봉우리는 설봉(雪峰)
계곡은 설곡(雪谷)
벌판은 설원(雪源)
시내는 설천(雪川)
호수는 백호(白湖)를 이루었네.

설원에는
스키를 타는 사람
낚시를하는 사람
스노우 모빌을 몰고
말 썰매를타는 사람.
저마다 저다운 취향으로
가족들과 즐기는
여가의 낙원이로다.

골퍼들은 봄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세월을 보내고

"간밤 백설에 덮여
청송은 머리가 희었고
이른아침 붉은 해가 솟아오르니
어느새 소년이 되었구나.

一夜松頭白 日出更少年

달도 밝고 눈도 밝고
하늘과 땅도 밝네
산도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의 수심도 깊구나.

月白雪白 天地白 山深夜深 客愁深 김삿갓."

Laek Tahoe 에는
온 세계 방문객들의 밝은 눈빛에
자정이 중천같이 밝구나.

청산에 백설이 내리니
온 천지가 설국(雪國)이로다. ( 2011 정월 초하루)

문장학 강론

문장 작법에 대하여 (샌디에고 문장교실 강론 원고)

정용진(시인)

문예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의 구성이다.

작가가 문장을 구성하기 위하여서는 주자소에서 활자를 주조하기 위하여 금형(金型)을 만들고 금형에 쇳물을 붓고 모형을 다듬는
수고를 더하여 활자를 만들듯 정금을 얻기 위하여 용광로에 광석을 넣고 풀무질을 하여 정금을 얻어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시란 직관의 눈으로 바라다본 사물의 세계를 사유의 체로 걸러서 탄생시킨 생명의 언어인 동시에 영혼의 메아리다.

그러므로

시인은 진실하고

소설가는 궁리(窮理)하고

수필가는 솔직해야 한다.

시가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이라면,

소설은 허구(虛構)를 통한 상상력과 사실(寫實)의 통일적 표현으로 인생과 미(美)를 산문체로 나타낸 예술이다. 한편

수필은 자연과 사물에 대한 자연스러운 서술이며, 진솔한 고백이다.

시(詩)의 연 속에는 맥(脈)이 있어야하고,

소설(小說)의 문장 속에는 설(說)이 담겨져 있어야하고,

에세이(隨筆)의 내용 속에는 리(理)가 있어야한다.

시를 감상하고 그 속에서 진실의 맥박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수필을 읽어 그 속에서 문리(文理)를 찾을 수 없거나, 소설을 읽어
그 속에서 이야기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히 죽은 작품들이다.

시(詩)에 진실이 결여되면 미사여구(美辭麗句)의 언어적 나열이나, 짧은 글로 끝나기 쉽고, 소설이 지루하고 흥미가 없으면
사장(死藏)되게 마련이고, 수필이 자화자찬(自畵自讚)에 치우치거나 객관적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

시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心象)에 초점을 맞추는 이미지의 발굴이요, 본뜻은
깊은 내면 속에 깊숙이 숨기고 비유하는 형상만 드러내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수사법(修辭法)의 은유(隱喩)가 핵심이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하여 원고지 앞에 펜을 들고 설 때에는 생명을 조각하는 심정으로 서야한다. 이는 마치 석공이 비석에 글자를
한자 한자 바로 새기기 위하여 서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교훈으로 유좌지기(宥座之器)란 명언이 있다.

내용인즉 공자가 제(濟)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찾았는데 거기에 똑바로 서있지 않고 삐딱하게 서있는 잔 하나를 보았다.
관리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환공이 평소에 늘 아끼던 잔으로 ‘속이 비어 있으면 기울어지고 물이 알맞게 차면 바로 서지만
가득차면 다시 기울어집니다.’ 하였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세상에 가득 차고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차고 넘치면 모라는 것만 못하다.’ 하신 말씀에서 유래한 명 비유다.

나도 시와 수필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늘 근심하는 것은 다작(多作)은 수작(秀作)만 못하고 수작(秀作)은 심작(心作)만
못하다는 사실을 모든 문학 애호가들은 들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양(量)이 어찌 질(質)을 능가하겠는가.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등단의 영예를 얻고 그 기쁨이 다하기 전에 종단 작품이 되는 뼈아픈 현실을 맞이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조건 시나 수필 혹은 소설 등을 양산해서 발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정 스님의 지적처럼 “침묵의 체로 걸러서 탄생시키지
아니한 언어”들은 소음에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다작이 세상에 문학적 공해가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종이, 그 잉크, 그 노력의 낭비는 실로 마음이 차가운(寒心之事)일이다.



시조 시인의 대가 초정 김상옥 시인은 ‘시란 흙으로 빚은 도자기요,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시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과거에
출판한 자신의 여러 권의 작품집들은 다 무효이고 김상옥은 오직 ‘느티나무의 말’ 한권의 시조집만 남기고 떠난다. 강조하면서
오랜 시간 써서 모아 놓은 원고 일곱 가마니를 몇날 몇일을 걸려 내외분이 손수 찢어 버리면서 손이 부르텃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후 유작 운운하며 이런저런 작품들이 세상에 회자(膾炙)되는 것을 살아생전에 차단해 버리려는 작가의 고귀한 양심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진실해야 한다. 문(文)이 곧 인(人)이란 지적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 명문과 고전은 무수한 노력과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여과되어 나오는 온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다.

얼마 전 한 젊은이가 경제적 여유로 자신의 저서를 수 만권 출판하겠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불행한사람 이구나 차탄(嗟歎)한 일이 있다.

무엇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썻느냐가 중요하지 돈 많은 부호가 호화장정으로 펴낸 자서전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알아야한다.

창작의 세계에서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르고 깍고 쪼고 문지르는 것과 같은 피나는 노력만이 명작을 탄생시키는 첩경이다.

문학이란 자신의 마음과 가슴 속에 살아서 출렁이는 산 언어의 물결이다.

이는 반드시 용출하지 아니하면 못 견디는 활화산 같은 것이요. 토해내지 아니하면 못 견디는 카타르시스( Katharsis 정화. 배설)다.

우리 모두는 언어와 문자를 통하여 나 자신을 남에게 표현하고 타인의 심정을 읽게 된다. 이것이 타인의 재발견이요. 참 나의
표현이다. 진정한 문학이 이룩되려면 대화(Dialogue)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나 그러나 때로는 대화가 아닌 침묵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내 자신에게 조용히 물음을 던지는 이것이 곧 독백( Monologue)이다.

때로는 독백이 대화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대답이 어려울 때 조용히 웃고 마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 현명한
처사일 때가 많이 있다.

데카르트가 지적한 사고성(思考性)이 곧 인간의 위대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검은 침묵의 밤이 있을 뿐이다.

문학이 나무라면 가지는 소설이요, 잎은 수필이며, 꽃은 시다. 소설이 허구(虛構) 속에서 탄생 되었다면, 수필이 진실을 토대로
형성되며, 시는 스스로 아픔을 무릅쓰고 군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시인은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상상의 여백을 남겨두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

한 작품 속에서 모든 말을 내가 다 해버리겠다고 나선다면 군소리로 가득 찬 잡문이나 양산하는 삼류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시인을 농부에 비유하기를 즐겨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을 “언어의 밭을 가는 쟁기꾼”에 비유한다.

나는 오늘도 거친 언어의 밭을 갈기 위하여 손에 쟁기를 쥐고 광야로 나간다. 시는 분명히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붓을 들고 서재에서 창작에 정열을 기울일 때 가장 아름답다. 갑자기 유명해 지려고 소리치며 거리를 방황하거나,
단체를 만들어 장 자리를 차지하려하는 허식주의 작가는 역사 속에서 심판을 받게 마련이다.

뼈를 깍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피나는 노력과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고귀한 선비정신이 필요하다.

공자가 제자에게 학구정신을 강조할 때에는 군자(君子)가 되라고 가르쳤다.

군자는 최고 지성의 상징이요, 사회적 표상이었다. 이에 비유되는 말이 소인(小人)이다. 소인은 사회를 리드하거나 대업의
지도자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군자가 되려면 백련천마(百練千磨)의 피땀이 그의 삶속에 절절히 서려 있어야한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듯 남도 나처럼 사랑할 줄 알아야 위인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와
애기애타(愛己愛他)는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가.

나는 최고이고 남은 별 볼일 없이 취급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다. 공자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 배우기 위하여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 곧
교학불권(敎學不倦)의 정신이다. 학이불염(學而不厭) 회인불권(誨人不倦)배울 때에 염증을 느끼지 아니하고 가르칠 때에 권태를
느끼지 아니한다는 의미다.

당송8대가의 한분인 한퇴지(韓退之)는 사설(師設)에서 성인무상사(聖人無常師)라고 가르쳤다. 성인에게는 별다른 스승이 없고
모두가 그의 스승리란 뜻이다.

우리가 글을 사랑하고 글을 쓴다고 하면서 요란한 빈 수레바퀴의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리를 방황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시인이나
문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냉정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서야한다. 명작의 탄생이 기다려진다.



(필자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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