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2003.06.08 15:26

강학희 조회 수:618 추천:44

다림질 / 강학희

느슨히 담겨져
손을 기다리는 빨래감들
한 바스켓 빨아서
가슴 저 밑 이글거리는 불덩이 담아
기를 쓰며 문지른다

가는 목둘레에 아직도 눌려있는
긴장된 하루
올 풀린 소매 끝에 매달린 고단한
일상을 뜨거운 다리미로
밀어 버린다

구겨진 나 대신
너라도 반듯이 펴져라 힘껏 누르며
뻣뻣하게 달려드는 삶
너 보다도 더 빳빳하게 다려
가지런히 걸어둔다

빨래 다리다 말고
나를 다리느라
애꿎은 남편 바지 하나 태워 먹었다

벌겋게 데인 얼굴로
처연히 웃는 너
차마 버리지는 못하리

* 순수문학 시부문 신인상 2003 2.
*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한인 문학 대 사전

작가 메모;

아무리 바쁜 일과라도 가능하면 집에서 물빨래를 하고, 모아서 다림질을 하는 건 다림질을 하면서 흐트러진 생각들을 더듬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다림질하고 있는 빨래감처럼 나를 깨끗히 빨고 다려서 빳빳하고 정결하게 걸어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산뜻하랴.

그냥 적당히 기계세탁하기보다는, 얼룩지고 때가 낀 낡은 부분들은 먼저 조물조물 손으로 주물러 손빨래를 한 후 뜨거운 열정으로 판판히 주름을 펴듯 우리도 각자 좋아하는 매체로 자신을 정화하고 정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인은 글로써, 음악가는 음악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찢기고 상처난 마음들을 다독여 삶을 정화하듯, 우리 각자 선택한 자신의 매개체로 나 자신, 나의 삶을 재조명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다림질을 할 때면 뿌옇게 때가 낀 마음, 생각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정리 정돈해서 반듯한 그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순화하는 작업, 마치 글쓰는 작업과도 유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다림질을 즐기게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몸으로 신명나게 문지르고 나면 묵직했던 허리가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일그러지고 구겨진 내 생각에 밥풀을 먹이고 빳빳한 풀기를 살려 생각의 결에 따라 알맞는 온도로 꼿꼿히 눌러편 후 다시 다짐다짐해서 다른 생각들과 함께 가지런히 걸어두었다가 알맞은 날, 알맞은 때에 맞춰 떨쳐입고 나가는 일, 나의 다림질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다. 아니 맡길 수 없는 일이다. 꼭 불가피하게 생각이 정돈되지 못할 때 익숙하고 편한 친구나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게 되 듯, 세탁소를 찾게도 되겠지만 그런 때를 제외하고는 가능한한 다림질은 손수, 아니 마땅히 내가 직접해서 늘 다림질을 내 손에 익히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나의 삶, 나를 다림질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테니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시집 :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강학희 2012.11.27 1318
103 행, 불행의 차이는? 강학희 2003.06.17 707
102 마음의 소리 강학희 2003.06.19 702
101 유성 강학희 2005.03.06 695
100 킹스캐뇬 목불木佛 강학희 2003.06.10 695
99 지지 않는 별 강학희 2003.07.02 687
98 금문교 강학희 2003.06.25 675
97 동그란 말 또는 생각들 강학희 2005.06.12 674
96 겨울, 고픈 사랑에 대하여 강학희 2005.08.31 653
95 기忌제사를 맞으며 강학희 2005.06.12 651
94 바다, 바다로 가면 강학희 2003.06.08 649
93 JAY WALK(무단 횡단) 강학희 2003.06.12 645
92 왜 그럴까? 강학희 2004.01.22 642
91 한국산 마늘 강학희 2005.12.11 642
90 방생해야 할 것들 강학희 2005.11.05 641
89 난(蘭)을 분재(盆栽)하며... 강학희 2004.07.26 635
88 진주 목걸이 강학희 2005.12.11 627
» 다림질 강학희 2003.06.08 618
86 먼 그대는 아름답다 강학희 2004.08.26 609
85 가을에 띄운 편지 강학희 2004.09.23 606
84 기도하는 합창 강학희 2003.06.09 606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3
어제:
59
전체:
610,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