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중국 고추 장아찌

2003.10.25 02:17

강학희 조회 수:973 추천:49

합중국 고추 장아찌 / 강학희

1. 
매운기 땡땡한 헐러피뇨 
멕시코 작은 고추, 갸름 날씬한 한국 고추와 
몸통은 커도 심심한 미국 벨페퍼, 오랜지색 
귀여운 하바네로 칠리까지 
한 땀씩 숨통 틔워 새콤 달콤 끓인 
간장 목이 차도록 부어주었더니 
어둑한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나는지 날마다 
합중국 회의가 열린다 
서로 다른 입김으로 제 속을 풀어놓는 
이젠 집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사연들, 
아리고 쓰린 눈물 흘린다. 푸-욱, 쁘륵, 뿌르륵, 
푸석이더니 얼추 화합이 되어 가는지 
점점점 잠잠해진다. 

2. 
숨죽이고 새콤달콤 마음을 바꾸고 살다가 너 아닌 
너네 나라 어떻더라 하면 풋고추 일 때보다 
훠얼 쫀득해진 장아찌도 속이 쩌르르 성질을 낸다 
마음은 누그러졌어도 아직 남은 성깔로 속이 끓는다 
제대로 익으려면 가슴에 고여드는 
짠맛에 익혀야 진미니라 어미 말 잊고 
빳빳한 자존심이 또 요동을 친다 이민 삼십 년 
짠물에도 나는 아직 설익은 장아찌였던가? 
가슴의 물기를 한번 더 꽉 짜낸다. 

* YTN TV "동포의 창" 4월21일, 2006년 


작가 메모 

글로발 시대, 이젠 세계가 시공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몸이다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나만의 얼굴이 아닌 내 나라의 얼굴로 사는 
것이다. 서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로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지고 하나의 볼(bowl) 안에 
담겨 서로를 이해하고 보완하며 살아가는 것이 합중국의 삶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자란 
고추들을 모아 장아찌를 담그며, 이처럼 한데 모여 너도 나도 아닌 새로운 향을 만드는 
것이 이민 생활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끔은 그리운 내 나라로 돌아 가고 싶어 서러워지기도 하지만 안이함보다는 힘겹기는 해도 
나를 모르는, 내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것 또한 새로운 즐거움이고 도전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친구란, 가지고 있는 배경이나 소유, 또는 그 모양이나 색갈에 관계없
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 서로 가슴 속 깊이 담긴 애환을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
로를 닮아가는 합중국의 삶은 힘든 만큼 또 색다른 기쁨이 따르게 마련이다. 

살아 갈 수록 나는 너의, 너는 나의 기쁨이 되어주는 합중국 삶이 참 소중하게 생각된다 서로
가 배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작은 항아리에 담긴 각종 고추처럼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우리를 만드는 시간에 감사드린다. 숲은 숲 밖에 서야 보이듯 먼 곳에서 바라보는 내 조국, 
얼마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지 떠나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내가 살고 있는 곳
에서 한국의 맛을 풀어내는 한국산 고추 장아찌이다. 살면서 여물어가는 맛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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