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따구리의 추억

2004.04.22 13:44

유금호 조회 수:211 추천:18

오색딱따구리의 추억


유 금 호





1

보통 사람들에게 "오색딱따구리"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아마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그러나 "크낙새"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마 "아하, 그 천연 기념물"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색딱따구리"는 크낙새 사촌쯤 된다. 크낙새보다는 조금 작은 몸집에, 전체 몸 빛깔이 이름만큼 화사한 녀석이다.

하지만 사실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숫하게 많은 새 들 중에서 깊은 산, 말라죽은 고목 줄기에서나 가끔 발견되는 딱따구리 같은 특별한 새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르겠다.


바로 이 오색딱따구리 한 마리를 가정에서, 그것도 남의 집 사글세방에 살면서 젊은 날 2년 넘게 길렀다면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가 싶다.

 

신혼 초, 간신히 단칸 사글세방을 마련해서 살림이라는 걸 시작하면서 내가 맨 앞서 한 일이 새장을 마련해서 새를 기른 일이었다.


그것도 쉽게 번식도 되고, 시끄럽지도 않은 십자매나 문조, 금화조 따위를 기른 게 아니고 하루 종일 마른나무 둥치를 쪼아대는 "딱따구리"를 기른 것이다.


청계천 7가 쪽에 나가면 새 가게들이 몇 집 있었고, 그 가게들에 어쩌다 산에서 붙잡아 온 희귀한 새(지금은 불법이어서 안되겠지만)들이, 거기 일반 양조 들 사이에 끼워 있었다.


우연하게 그곳에 들렸다가 그 "오색딱따구리"를 보았고, 나는 두 말 없이 상당한 거금을 투자해서 그 녀석을 우리 신혼 방에 식구로 입주를 시켰던 것이다.


아내는 지금도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좁은 신혼 방에 쳐들어온 그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녀석은 좁쌀 따위의 곡식을 먹는 게 아니고, 원래 벌레를 먹던 놈이 되어 먹이 문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날마다 벌레를 잡으러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보니, 결국은 삶은 달걀 노른자며, 고기를 잘게 여며 먹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내 수입으로 쉽게 고기를 사 먹을 수도 없는 시절이어서 결국 우리는 이 녀석이 먹고 남긴 것이나 먹어야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이놈은 끊임없이 마른 고목을 쪼아대어, 구멍 속에 들어 있는 벌레를 먹는 습성이어서, 매일 장작 반 토막 정도는 완전 부스러기로 만들어 놓았는데 도시 한 가운데서 매일 장작 토막을 구해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개월이 그렇게 지났을 것이다.


날까지 잔뜩 흐린 날이었는데, 퇴근하고, 방안에 들어서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아해 할 사이도 없이 뒤이어 주인댁 아주머니가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한 채 뒤따라 들어오면서 당장 방을 빼달라는 거였다.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손끝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아뿔사, 나도 맥이 빠져 버렸다.


출근하면서 바람이라도 쏘이라고 현관 기둥에 딱따구리 새장을 걸어 놓고 나갔던 것이다. 새장이 걸렸던 기둥 중턱이 3분의 1 쯤이 완전 걸레가 되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왜 그렇게 웃음이 터졌던지.


집을 쫓겨 나온 후에도 그 "오색딱따구리"는 1년 반을 우리 내 곁에 더 있다가 아파트로 들어가면서, 결국 산이 연결된 공원으로 데리고 가 날려 주었다.


정이 들었던지 이 녀석이 한 시간 가까이 멀리 떠나지 않고 우리 곁을 맴돌자 아내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이 딱따구리가 아내를 두 번이나 울려 준 셈이었다.


사실 신혼 초 아내는 "새"에 대한 내 특별한 관심 때문에 많이 곤혹스러웠으리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사람, 그것도 한적하게 숲과 나무, 벌레, 그리고 숫한 산새들 사이에서 자란 나 같은 사람에게 도시는 가끔 유년의 향수라는 건 얼마쯤 숙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아내는 결혼 전, 내 유년의 얘기들 속에 빠짐 없이 새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시골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전남 고흥의 끝자락에 있던 바닷가 과수원집.


내 유년은 그래서 뱁새며, 오목눈이, 방울새, 할미새, 때까치, 물총새들과의 교감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었고, 과수원 언덕이나, 울타리에는 봄이면, 둥우리를 만들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산새들이 무척 많았다.

어느 나무 가지 끝에 때까치의 알이 몇 개 있고, 울타리 밖 산사태 난 붉은 벼랑의 어디에 물총새가 알을 낳았는지 훤히 알고 있었고, 그 나만의 비밀은 내겐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재산이며, 희열이었다.

그러나 광주로 중학교 진학을 하면서 결국 어른이 될 때까지 유년의 그 혼자 간직하던 재산과 비밀은 향수와 꿈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 언덕과 울타리 사이에서 작은 산새 새끼를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내가 내 집을 가질 수 있을 때, 맨 처음 산새를 손수 기르리라.


사람 손에서 쉽게 자라는 종류 말고, 어린 시절 내가 직접 보았던 그 산새들, 열 두 살, 고향을 떠난 후에는 다시 그 산새들이 둥우리 만들어 가는 과정을, 알이 불어 가는 것을, 새끼가 커 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던 산새를 직접 기르리라. 소쩍새와 딱따구리, 물고기만 먹는 물총새도 직접 기르리라.

그것은 꿈이었고 어쩌면 내게 강박관념이었다.

 

2

이제 머리가 반이나 희어져 버린 연륜 속에서도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 내 곁에 있었던 그 작은 산새들의 둥우리와 그 둥우리 속에 앙징스럽게 들어있던 작은 산새 알 껍질에 아로새겨진 무늬들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내가 그 산새 들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역시 흰 머리가 눈에 띄는 아내는 내게 다시 기르고 싶으면 딱따구리든, 물총새든 길러 보라며 웃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흔든다.


이미 떠나 버린 것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일. 그것이 글을 쓰는 일이라는 것을 짐작한 뒤부터 나는 직접 딱따구리를 방안에서 기르지 않아도 초조하지 않다.

내 유년의 추억들을 안고 있는 바닷가 과수원 언덕은 이미 여러 해전부터 옛날의 형체를 잃어버린 것을 고향을 찾았다가 지나면서 본적이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산새들도 더 이상 그곳에 둥우리를 짓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이미 먼 곳으로 떠나버린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해도 내 가슴속에는 그 산새들처럼 살아 있어서 나는 내 소설 속에서 그들을 다시 만난다.


흘러가 버린 그 시간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능성.


그 불가능성 때문에 나는 소설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 소설 속에는 그래서 흘러가는 강물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사금(砂金)조각 들 같이 늘 내 유년과 산새들이 살고 있다.

 


아내 김정수 역시 딱따구리 때문에 사글세방에서 쫓겨났던 기억이 10년도 넘게 "전원일기(田園日記)를 쓸 수 있는 동력의 일부를 주었을 것이다.


시댁의 과수원에 대한 간접 체험이 그로 하여 시아버지를 떠올리는 최불암 회장의 이미지를 쓸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우린 어차피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잃어간다.


이별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 몇 년을 방학 때만 되면 세계 곳곳을 헤매면서 찾았던 때가 있었다. 아프리카 마사이족 원주민 마을에서 만년설의 킬리만자로 봉우리를 올려다보기도 했고, 몽골의 끝없는 초원, 카라코롬에서 주먹만큼씩 만한 새벽 별을 바라보기도 했다. 안데스 산정의 옛 잉카의 유적지 마추픽추 산꼭대기에서, 아마존 강 밀림의 원주민 마을에서 혹시나 내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숨어 있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데도 내 잃어버린 시간은 숨어 있지 않았다.

도리어 컴퓨터 앞에 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서 나는 자유롭게 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불러오고 만나는 행운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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