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

2013.05.04 05:13

동아줄 조회 수:287 추천:30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
            ―또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강은교



눈으로 듣는 시를 위하여


당신은 오늘도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분홍빛 봉투의 편지는 나에게 긴장을 지나 겁을
일어나게 하면서, 그러나 종내에는 뜯게 만든다. 그 속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말들과 그리고 질문들이
씌어 있었다. 당신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개인은 의미가 없지요? 너도 나도 의미가 없지요? 이 상품 자본의 시장에선 더욱
그러하지요? 모든 의미가 있으려 하는 것은 실은 의미가 없지요?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무의미를
끊임없이 의미가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 개인의 무의미는 역사가 증언하고들 있으니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러기에 이
세기말에서는 시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미 없는 개인을 부추기는 시가 오늘의 시일 것이다.
자유의 얼굴을 보여주며 자유의 살을 만지게 하며 자유의 피를 마시게 하는 오늘의 미사. 그것이 시일
것이다.

그 다음에 있는 당신의 이야기는 “눈으로 듣는 법”(니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그렇다, 그렇다고 중얼거린다. 오늘의 시를 쓰는 일은 “눈으로 듣는 일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니체의 말대로 “귀를 다 쳐 떼내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그 말을 당신과 나의 시를 위해선 “‘틀’을 벗는 일”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틀’ 또는 ‘판’에 박힌 것들을 떠나라. 당신의 원고지는 실은 수많은 ‘틀’들로 소란하다. 당신은 당신의
원고지가 하얗게 비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원고지는, 또는 A4 용지는 하얗지 않다. 그것은 아주
검다. 이미 씌어진 말들로 시끄럽다. 또는 이미 칭찬받은 말들로 소란하다. 소란한 그런 당신의
원고지를 떠나라.

당신의 이데올로기, 그런 것에서 떠나라. -당신은 그런다면 아주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염습을 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손이 그렇게 작은 것을 처음 보았다.
피도 빠지고 그리고 모든 수분이 빠졌으므로 그렇게 수축한 것이리라. 그렇게 수축한 어머니의 손은
말랑말랑한 작은 공 같았다. 나는 어릴 때 저 큰 하늘을 향하여 던진 말랑말랑한 작은 공을 거기서
보았다. 그것은 거기서 내가 모르는 우주로 던져지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우주 그것은 죽음이라는
곳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곳의 ‘틀’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주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유로운 그녀와 그녀의 죽음을 무덤이라는 ‘틀’에 가두며, 우리의 슬픔으로 가두며, 우리의 추억으로
가둔다.

‘틀’을 벗어나라. 그래서 당신의 백지를 당신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떠나게 하라. 그러는 방법은, 할 수
없다! “눈으로 듣는 일”일 것이다.

눈으로 들으면서 거기 사유를 얹는 길일 것이다.

리듬 사이에서 당신의 울타리를 저 먼 공간으로 던져버리는 일일 것이다.

당신은 또 질문한다. 그렇다면 눈으로 듣는 방법은? 당신의 펜이 편지지 위에서 머뭇대는 것을 나는
느낀다.

나는 이런 대답을 준비한다. “눈으로 듣는 법은 대상을 직시하는 것이다. 대상에 몰입하여라. 대상이
흘리는 보이지 않는 땀을 건져올려라. 귀뚜라미 또는 이 봄 새로 깨어난 파리 한 마리가 흘리는 땀을
건져올려라. 언어로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언어로서.

크게 소리를 쳐보아라. 당신의 큰 소리가 저 ‘틀’의 보이지 않는 어둠을 넘어 변신하는 것을 보아라.

당신은 끝없이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가 달려오는 순간을 변신한 당신의
몸으로써 맞아야 한다.

당신의 변신은 대상을 결코 감정으로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이다.

대상을 직시하고 그리고 대상의 목소리 속으로 깊이 들어간 곳에서 당신은 당신의 감각들을 전부 깨워
일을 시작하여라. 거기 어떤 이데올로기도 없어진 자유로운 곳에서, 어떤 말의 유행도 없어진 그런
곳에서 대상의 목소리를 건져올리는 것이다. 다만 언어로서 건져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대상 속으로 들어가 대상으로 되는 변신을 순간적으로 이뤄라. 그럼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라.”

변신으로 이룩한 자유 속에서 당신의 언어가 당신의 사유가 되게 하라. 당신의 언어의 울타리가
당신의 사유의 울타리가 되게 하며 그로써 당신의 자유를 원고지 위에 또는 A4 용지 위에 실천하라.

나는 지난번 산행에서 도롱뇽 한 마리를 만났다. 연한 회색의 등이 낙엽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것이 나뭇잎이든가, 뭐 그런 것인 줄 알았다. 봄산에는 무수한 낙엽 속에 새싹이 돋고
있었으니까. 무수한 죽음 속에 생명이 일어서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새싹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보니 도롱뇽이었다. 네 개의 작은 발이 그것의 작은 몸을 낙엽 사이 부는 봄바람 사이에서
가늘게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디로 가는가를 지켜보았다. 잠시 뒤 그것은 더 깊은 낙엽
속으로 자기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생명의 모습이 되어.

그 도롱뇽을 그려라. 그것을 언어로써 그려라. 당신은 그 언어 속에서 도롱뇽이 되어라. 그래서 그
도롱뇽을 자유롭게 만들어라. 그것이 변형이며 변신이다. 변형은 당신의 변신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언어로써 떠나라,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라.

당신의 삶에 당신이 더 깊이 몸을 박을수록 당신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 감각의 바다를 지나 눈으로 들으면서 거기 사유를 얹는 길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유 사이에 리듬을 얹는 길일 것이다.

리듬 사이에서 당신의 울타리를 저 먼 공간으로 던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은 자유로워지리라.

그러나 당신의 언어는 사유의 옷을 입어야 함을 잊지 말라. 그러나 결코 그것을 빌려 입게는 하지 말라.
당신이 변신하지 않는 한 당신의 언어의 옷은 아직 세탁소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세탁소는 당신의 언어를 세탁하고 있다. ‘틀’에 맞는 언어로, 대상을 떠난 언어로 세탁하고 있다.

그 세탁소를 떠나라. 제발 사유하여라. 사유는 니체가 말한 대로 존재의 가능성이다. 가능성의
분석이며 판별이다. 그런 사유의 깃발을 당신의 언어에 주어라. 그런 다음 그것이 당신의 틀을 벗어난
원고지 위에 앉게 하여라. 지금 당신에게는 그러한 사유의 힘이 부족한지 모른다.

나에게도 그러한 것이 부족하다.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시인들은 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나는 이러한 제안을 한번 해보겠다. 완전한 무보상에 당신의 하루와 당신의 피와 당신의
언어를 투자하는 연습을 하여보아라. 전혀 보상 없는 것에 투자하는 연습을…… 그리하여 주관화와
입술을 대고 있는 객관화의 물결 속으로 그것들을 다시 던져보아라.

주관화와 함께 있는 객관화는 존재를 떠나는 일이 아니다. 주관화와 함께 있는 객관화는 실은 존재에
돌아오는 일이다.

대상을 철저히 객관화한 다음 그런 다음 대상의 주관 속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시를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가져가는 일일 것이다.

내가 자주 가는 다대포라는 해안에는 썰물 때면 회색 갯벌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회색 갯벌에는
무수한 바다 생물들이 기어다니고 있으며, 게들이 동그란 구멍을 만들고 있다. 물이 들어오는 속도는
무척 빠르다.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면 물은 삽시간에 모래밭 가에서 출렁거린다. 황혼 때면 거기 물
위에는 반짝이며 붉은 파도가 달려들어온다. 꼭 붉은 말들이 바다를 뛰는 것처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송도의 바다에서는 아침이면 햇빛에 물결의 살〔肉〕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럴 때는 그것은 바다가 아닌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것이야말로 바다의 정체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정체를 당신은 그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은 변신하여라.

당신의 시는 변신의 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변신 속에서 당신의 시는 읽는 이의 가슴속으로 달려들어오리라.

아니다. 아무의 가슴에도 당신의 시는 닿지 않을지 모른다. 하긴 그러한 순간을 상정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의 시는 물결치지 않겠는가. 당신의 시는 밀물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다음 순간
썰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밀물과 썰물은 바로 변신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 2015 신춘문예 시조 총평 동아줄 김태수 2015.05.18 409
39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앵커리지 한인신문 기사 내용(15년 7월 8일자) 동아줄 김태수 2015.07.20 154
38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표절? 동아줄 김태수 2015.08.05 649
37 수필 문장, 이것만이라도 알고 쓰자 [1] 동아줄 김태수 2015.08.08 341
36 수필 문장, 이것만이라도 알고 쓰자 (2부) 동아즐 김태수 2015.08.08 357
35 한국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한 제언 동아줄 김태수 2015.09.18 356
34 친일 문인 42명 명단과 작품 목록 동아줄 김태수 2015.10.09 149
33 2015 전국 의병문학작품 공모전 동상 수상, 앵커리지 한인신문 기사(9/28일자) 동아줄 김태수 2015.10.10 42
32 제18회 전국 시조공모전 입상자 명단(대학.일반부) 동아줄 김태수 2015.10.15 71
31 2015 곤충나라 사과태마 공원 개장 기념 전국백일장 입상자 동아줄 김태수 2015.10.26 351
30 김태수 씨, 전국시조공모전 차상 수상[Korean News 10/21자 기사] 동아줄 김태수 2015.11.11 230
29 2013년 시에 수필 신인상 심사평 동아줄 김태수 2015.12.02 134
28 윤태영의 글쓰기 심화를 위한 노트 동아줄 김태수 2015.12.12 92
27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동아줄 김태수 2016.01.11 188
26 작문오법 및 일자문결 동아줄 김태수 2016.02.20 162
25 2015 증앙시조백일장 당선작 동아줄 김태수 2016.02.27 109
24 등단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동아줄 김태수 2016.05.20 1274
23 21세기 한국 수필의 과제와 잔망 동아줄 김태수 2016.05.21 163
22 2016년 신춘문예 시조 총평 동아줄 김태수 2016.05.24 354
21 최영미와 한강 동아줄 김태수 2016.06.07 76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53
어제:
59
전체:
1,168,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