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에게 주고 싶은 말

2014.07.18 07:55

동아줄 조회 수:308 추천:13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에게 주고 싶은 말

-내일의 시인이여, 이런 시를 써라


어느 날의 짧은 시 이야기
신  경  림 | 1956년 《문학예술》지 시 추천
어느 날 인사동에서 시를 공부한다는 젊은이를 만나 다음과 같은 짧은 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이 : 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를 공부하는 문학도이기도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능한 한 아이들한테 많은 시를 읽게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시가 너무 많은 겁니다. 현대시는 당연히 이렇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가, 이 점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십시오.

나 : 현대시가 어려워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령 1차대전 후 시가 너무 어려워져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자 이를 걱정한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 같은 시인은 《옥스퍼드 북 오브 라이트 버즈(Oxford Book of Light Verse)》라는 앤솔로지를 편집하면서 가볍고 대중적인 시 운동을 주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시는 소리와 가까운 것으로 여겨져 왔지요.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시인들은 시를 가지고 노래만 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시를 통해서 삶의 가치와 진실을 추구하고 세상을 새롭게 발견해 갑니다. 나아가서 소재를 밖에서 찾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찾는 경향도 갈수록 심해집니다. 말하자면 시를 통해서 자기탐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러니 시는 자연 어려워지고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길은, 처음에는 산문, 다음에는 영상매체로부터 위협을 받으면서 시가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시의 난해성에는 일정부분 부득이한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전혀 필연성이 없는 엉터리 난해시입니다. 이런 엉터리 난해시가 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시인이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말할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경우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니까 자연 시가 어려워집니다. 두번째는 말장난에 치우친 경우입니다. 말을 돌리고 비틀고 하다 보니까 시가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세번째는 시를 억지로 만드는 경우입니다. 내용이 없으니까 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난해시, 이런 시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애정을 가져야겠지요. 하지만 엉터리 난해시는 독자로 하여금 시를 외면하게 만드는 내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이 : 요즘 독자들은 더욱 시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원인이 다 시인들한테만 있는 걸까요?
나 : 물론 그렇지는 않지요. 산업혁명 이후 매체의 확대는 계속 시를 압박해 왔습니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시를 대신하여 산문을 문학의 왕자 자리에 앉혀 놓았으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영상매체가 대중의 총아가 되지 않았습니까. 21세기는 인터넷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전세계적으로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종이문화 전체가 사이버예술 앞에 위축당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그 피해자의 선두에 시가 서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들이 이제 시는 쫄딱 망했다고 청승을 떨거나 비분강개하는 꼴은 정말 보기 역겹습니다. 한때 시가 산문이 할 수 없는 것을 찾았듯이, 사이버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시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들이 마음을 닫고 속으로 움츠릴 것이 아니라 활짝 열어제치는 것입니다. 시가 너무 닫혀 있어 독자와의 대화 또는 교섭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지금 시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젊은이 : 저같이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나 : 물론 이런 시만이 좋다, 시란 이렇게 써야만 한다고 좋은 시의 기준을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터무니없이 용감한 사람이거나 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시를 좀 써달라는 것입니다.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시가 너무 많아요. 다음으로는 시를 억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나도 시는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시를 만드는 경향이 너무 심해요. 시가 작위적이라는 뜻이지요. 리듬이란 게 뭡니까? 자연스러움, 바로 그것이 리듬이 아니겠어요? 요즈음의 시에 리듬이 없다는 말은 시가 너무 작위적이어서 나오는 말이지요. 또 시를 너무 마구들 써대요. 많이 쓰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 쓸 수 있는 시를 다섯 편, 열 편으로 쓰는 경향들이 있어요. 이래서 시의 인플레가 생기고 시는 더욱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요. 이런 경우도 보았어요. 첫시집이 아주 좋아서 제가 극찬을 한 신예가 있었어요. 1년이 안돼 두번째 시집이 나왔어요. 한데 그 수준이 영 엉망이에요. 알고 보니 습작시절에 썼던 시를 묶어서 냈다는 거예요. 그 신예는 두번째 시집으로 인해 첫번째 시집의 명성도 스스로 까먹었어요. 자기 작품이라도 과감히 버리고 취하는 용기가 없다면 좋은 시를 쓰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위 유행에서 과감히 벗어나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남들과 달라야 그게 좋은 시지 남들이 다 쓰는 그런 류의 시를 써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젊은이 : 고맙습니다.


미래의 시인들에게
―― 영합과 우월로부터 자유롭기
정  진  규 |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사실 이런 글은 재미가 덜하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투의 선험자의 교조적인 발성은 아무래도 경직성을 동반하며 상투적이기 쉽기 때문에 내 구미에 맞지 않는다.
차라리 시나 한 편 함께 읽자.

오동잎에 바람 이니 서글퍼져 장사壯士의 마음 괴로운데,
희미한 등불에 풀벌레 소리 차가워라.
그 뉘일까? 나의 한 편 시고를 읽으며,
화충花蟲이 좀먹지 않게 할 사람은.
서글픈 생각에 이 밤 가슴 메이고,
차가운 빗속을 향혼香魂이 내게 조상오네.
가을 무덤 속에 귀신되어 포조鮑照의 시詩를 노래하리니,
한스러운 피는 천년을 두고 땅속에서 푸르리라.
                                                ―― 이하李賀(中唐 790∼816)

* 和蟲 :  나무좀과에 속한 좀벌레
* 鮑照 :  (?~466)  중국 육조 송나라 때의 시인. 특히 악부에 능했다. 여기서 포조의 시란  
        死者의 감개를 나타낸 시를 가리킴.

불운했던 시인. 27세라는 짧은 생애로 요절한 귀기鬼氣어렸던 신현神絃의 시인. 이하李賀를 읽을 때마다 다음 구절이 떠오른다. “세상 사람들이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을 뜯을 줄 모르니,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좇아 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느냐.” (명말明末, 홍자성洪自誠 『채근담菜根譚』)

어찌 이 구절뿐이겠는가. 다음 구절이 더욱 가슴을 친다.
“소위 시인이란 것은 음시吟詩깨나 한다고 시인이 아니요, 가슴 속이 탁 터지고 온아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무식이라도 참 시인일 것이요 반대로 성미가 빽빽하고 속취俗趣가 분분한 녀석이라면 비록 종일 교문작자(咬文嚼字 어려운 글자를 즐겨 써서 학문을 자랑하거나 재주를 뽐냄을 형용한 말)를 하고 연편누독(連篇累牘 문장이 지나치게 장황함)하는 놈일지라도 시인은 될 수 없다. 시를 배우기 전에 시보다 앞서는 정신이 필요하다.”(『수원시화隨園詩話』)

인용이 장황해졌는가. 내가 〈교문작자〉, 〈연편누독〉이 되어 버렸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점들이 이하李賀를 외롭게 소외시켰기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우리 현대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보이는 것만 계속 보고 들리는 것만 계속 들으면서 지루한 줄 모르는 게 오늘날 우리 시단의 한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지루한 줄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편하자는 속셈이요, 저희들끼리만 울타리를 치자는 역겨운 작당의 누추한 몰골이 아니던가.

미래의 시인들이여. 그대들도 저러한 현실에 시달리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것을 내보이면 읽히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자서有字書’만 내 보이고 ‘유현금有絃琴’만 내보이는 영합주의迎合主義의 비겁을 저지르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저 소중한 ‘무자서無字書’와 ‘무현금無絃琴’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들의 새로운 ‘서書’와 ‘금琴’을 울면서 포기하고 있지 않은지. 미래의 시인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나는 오직 이것뿐이다. 당신들의 내면엔 분명 ‘신현神絃’이 있고 신운神韻’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라. 이하李賀의 표현대로 그대들의 저러한 시고를 읽어 화충花蟲(좀벌레)이 좀먹지 않게 할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에 있음을 믿는 외로운 자존이 시인됨의 시정신임을 잃지 말자.

또 하나는 보다 본격적인 시정신의 문제이겠는데, 대상을 수용하는 이른바 ‘화자 우월주의’ 상위 시각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자신만의 말을 하고 태어나는 대상의 말을 듣지 않는 일방적인 화법을 뜻한다. 이러한 화법은 해마다 신인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직접 보고 느껴온 것이기도 하고, 우리 기성 시들에도 미만해 있는 한 고질일 수도 있다. 이 또한 앞서 말한 ‘유자서有字書’나 ‘유현금有絃琴’의 한 형국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관념의 감옥이다. 이렇게 되면 시가 설명적인 해석이 될 수 밖에 없고, 유형화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의 작동이란 그 순간부터가 대상과의 합일을 뜻한다. 상호 교감交感의 구체적 활동을 뜻한다. 대상들이 하는 말을 듣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듣는 귀가 열렸을 때 시를 쓰는 몸에는 율律의 무늬가 일기 시작한다. 그 율律의 무늬가 바로 시詩가 아니겠는가. 예를 들자면 앞서 인용한 이하李賀의 시 두번째 구절 “희미한 등불에 풀벌레 소리 차가워라”도 그렇다. 번역의 문제이기도 하겠으나, 원문은 이렇다. “쇠등낙위 제한소衰燈絡緯 啼寒素”, ‘쇠등衰燈’은 희미한 등불, ‘낙위絡緯’는 가을 풀벌레, ‘제한소啼寒素’가 문제다. ‘제啼’는 운다. ‘한소寒素’는 차가운 흰 깁. ‘한소로 운다’라고 직핍해야, 아니면 ‘차가운 흰 깁으로 운다’라고 해야 그 울음의 이미지, 촉감이 살아나고 색채감각이 살아난다. 그게 설명이 아닌 ‘율律의 무늬’이며 대상의 ‘무자서無字書’, 그 화답이다. ‘무현금無絃琴’의 소리이다. 이것을 보고 듣는 체감體感이 새로운 시를 태어나게 한다. 화자 우월주의 상위 시각은 나아가 시를 평면화하고 왜소화시킨다.

여기까지의 나의 말은 미래의 시인들에게만 국한시킨 말이 아니다. 이는 우리 시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을 위해 좀더 세부적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이며 나 개인의 시론이기도 하다. 좀 어조나 문체가 옛스러웠는가. 진지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한 획을 긋는 시를 쓰자
이  근  배 | 1962년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 시·시조 당선
이 땅의 모국어에 새옷을 입히는 아침이 있다. 신문학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던 20세기 초엽, ‘신춘문예’ 제도가 신문에 의해 생겨나면서 우리의 시(문학)는 한 해에 한 번씩 키높이를 이뤄왔었고 오늘까지 꼬박 80년 동안 모국어를 활짝 꽃피워 왔다. 신춘문예가 우리 문학사의 한가운데서 맥맥히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임을 나는 깊이 믿고 있다. 가령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서정주(시), 김동리(소설), 이호우(시조) 등이 당선된 예만 보더라도 신춘문예라는 상대평가의 자리에서 뽑힌 작품 혹은 작가가 오늘의 문학에 얼만큼 영향을 주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새해 이른 아침 사람들은 조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신년호를 펼치면 신춘문예 당선시에 먼저 눈이 간다. 거기에 모국어가 이 땅의 시가 더 높은 발돋움을 하고 새로운 탄생의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이른바 ‘에포크 메이킹’은 신춘문예가 주도해 왔고 시의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은 오래 남아서 읽고 또 읽힌다.

들끓는 가슴으로 붓을 갈며 신춘문예를 향하여 돌진하는 문학신인들은 자신이 갈고 닦은 기록이 지금까지 앞서간 선배나 함께 겨루는 동료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를 시험받게 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면 세계기록을 깨뜨려야 하듯이 당선을 움켜쥐려면 기성의 벽을 넘어야 한다.

어느 신문에는 어떤 경향의 심사위원이 작품을 고른다거나 최근 몇 년 동안 어떤 유형의 작품이 당선되었다든가 하는 정보는 참고는 될지 몰라도 기웃거리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눈치놀음은 자신을 깎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선’이라는 목표를 두고 전략 따위는 따로 없는 것이다. 오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창적 세계를 열어가는 길, 앉아서도 쓰고 서서도 쓰고 눈감고도 쓰고 쓰러져서도 쓰는 일, 그것만이 최선의 전략이요 당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그러나 쓰기 위해서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신춘문예’의 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응모작품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시 한 편을 고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누군가가 즐겨 쓰는 시의 아류라든가 한창 유행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뻗어온 시문학사의 줄기에 한 치 높이의 새순을 내밀겠다는 의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첫째, 글감을 고르는 일부터 엄정해야 한다. 목수는 나무를 잘 골라야하고 조각가는 좋은 대리석을 구하러 나설 것이다. 좋은 목재는 한두 해 자란 것이 아닐 테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깊은 산중에서 자란 희귀한 나무를 찾았을 때 목수는 신명이 나듯이 좋은 글감을 얻고 나면 인스피레이션도 저절로 오지 않겠는가.

둘째, 시의 생명은 주제에 있다. 전쟁이나 혁명, 그런 인류사적인 것만이 주제가 아니다. 작은 풀씨, 곤충의 날개짓 하나에도 가슴에 와 박힐 따끔한 주제를 내세울 수 있다. 큰 목소리를 내거나 많은 것을 주워담으려기보다는 작은 것이라도 선명하게 떠올려지는 시인의 생각이 살아 있으면 큰 시가 되는 것이다.

셋째, 살아 움직이는 말을 쓰자. 아무리 좋은 글감, 빛나는 주제라도 문장이 서지 않으면 시가 되지 못한다. 특히 우리의 문학은 문장의 문학이다.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 희곡, 평론 등도 레토릭에 의해서 글이 죽고 살고 한다. 한 마디로 살아서 펄펄 뛰는 말을 쓰면 시는 살아서 펄펄 뛰고, 죽어서 썩는 말을 쓰면 시는 죽어서 썩는다. 이미 닳고 닳도록 쓴말, 하도 오래 눈에 익고 귀에 박혀서 이끼 낀 바위가 된 말은 모두 내다버려야 한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시는 세상을 깨우는 힘을 갖게 된다.

넷째, 새 이름을 만들자. 시쓰기는 이름 짓기이다. 사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새로 짓는 일이다. 하물며 시의 이름(제목) 짓기를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평이한 제목으로도 좋은 시가 나올 수 있지만 아무도 써보지 않은 새 이름을 가지고 나서는 것이 더욱 신선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좋은 시로 가는 길은 무수히 열려 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길이 아니라 내가 없는 길을 뚫고 가는 것이 창작이라면 쓰고 또 쓰는 ‘나의 길’을 열어갈 일이다.

중얼거리며 헤엄치기
김  광  규 | 1975년 《문학과지성》 시 등단
새가 ‘지저귄다’, ‘운다’, ‘노래한다’는 말을 흔히 쓴다. 참새가 짹짹거리고, 까치가 깍깍 짖는 경우를 빼놓고는, 비둘기, 종달새, 까마귀, 부엉이, 뻐꾸기, 소쩍새… 들이 ‘운다’고 말한다. ‘새가 노래한다’는 표현은 외래어의 번역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짐승의 경우, 돼지가 꿀꿀거리거나 쥐가 찍찍거리거나 맹수들이 울부짖거나 개가 짖는 경우를 빼놓으면, 우리말에서는 거의 모두가 ‘운다’. 너무나 눈물 흘릴 일이 많았던 우리의 민족정서에서 슬픔이 일상화된 언어관습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새나 짐승과 달리 물고기는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로 인식된다. 바닷속에서 고래들이 내는 소리를 옛날 사람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물고기는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그저 침묵하는 존재로 되어 있다.

지구에서 함께 사는 동물들과 인간이 공유하는 행위로 우리는 ‘울다’, ‘울부짖다’, ‘노래하다’, ‘침묵하다’ 등의 동사를 들 수 있는 셈이다. 동사 ‘말하다’는 인간이 독점하고 있다. 말하기, 즉 언술행위의 여러 형태는 ‘글을 쓰다’와 함께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그 가운데 ‘중얼거리다’도 인간의 독특한 언술방식이다. 특정한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사회적 이익과는 가장 동떨어진 말하기라 할 수도 있다. 누가 중얼거리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예 무시당하거나, “안 들려! 똑똑히 말해!”라고 힐난받는다. 그래도 중얼거림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주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누가 저더러 들으랬나” 하는 태도다. 이러한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많지는 않아도 이렇게 중얼거리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시인’이라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측할 수 없는 한 평생을 살아가려면, 하루하루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인생을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빠져죽지 않고 살아 있으려면, 계속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헤엄쳐야 한다. 물살이 급한 곳에서는 구명대를 달라고 고함을 치거나, 부유물을 붙잡고 매달려야 할 때도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이 몸부림을 생업生業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것만 해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고,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그런데 시인이라는 소수의 인종은 이 격랑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무엇인가 남들이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리고, 그것을 종이에 써서 읽어보라고 물에 띄워 보낸다. 생업에 바쁜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아예 알아듣지 못한 채 묵살하거나, 힐끗 쳐다보면서 “뭐라구? 헛소리하지 마!” 하고 윽박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종이쪽지를 퍼뜨린다. 몇번이나 익사할 고비를 넘기고 기진맥진하여 고해를 떠돌면서, 이 이상한 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쩌다 재수가 좋으면 낯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듣기도 한다. “이봐, 자네의 종이쪽지를 받아보았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더군.

그런 짓 그만두고, 빠져죽지 않을 궁리나 하게.” 반가워할 사이도 없이 그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멀어진다. 그래도 시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멀지 않아 자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고해의 짠물을 뱉어내느라고 숨을 헐떡거리며, 시인은 좀더 멋지게 중얼거리는 연습을 하고, 종이쪽지에 좀더 그럴듯한 사연을 적어보려고 몸부림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생업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고행이라도 하듯 이러한 짓을 계속하는 것을 수업修業이라고 지칭해도 될 것이다. 물귀신 또는 물신物神이 상어떼처럼 몰려다니는 고해에서 그냥 살아남기도 힘든데, 생업을 제쳐놓고 수업에 몰두할 수 있는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없고, 힐난을 받거나 놀림거리가 되거나, 심지어는 정신이 이상하다는 의혹을 마다 않고 이러한 일을 지속할 수 있는가. 평생 계속해야 할 이 수업에 입문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거나 찬탄하리라 기대하면 그것은 오해다. 음유시인이 리라를 연주하면서 천하영웅과 절세미인을 노래하면 수많은 청중이 귀기울이고 환호하던 때는 중세에 끝났고, 가난한 민중의 사랑을 받던 파블로 네루다도 지난 세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시인이 되어 문학수업을 할 결의가 확고하다면, 당신은 신춘문예를 통과하지 않아도 이미 시인이다.

문화저널21 & 계간 시인세계 제공 munhak@mhj21.com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0 제2회 맑은누리문학상 심사평 및 수상자 동아줄 김태수 2013.12.01 329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에게 주고 싶은 말 동아줄 2014.07.18 308
38 시조 자수고(字數考) 동아줄 2013.05.06 304
37 제8회 찬강문학상 시조 우수상/정황수 동아줄 김태수 2017.09.12 291
36 문학인과 댓글 문화 동아줄 김태수 2011.12.13 288
35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 동아줄 2013.05.04 287
34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동아줄 2012.04.26 274
33 국민 나물/계간 시평 동아줄 2014.02.26 267
32 詩 적게 고치고 다듬는 세 가지 전략 동아줄 2015.03.14 264
31 수필의 모습 동아줄 2012.04.13 261
30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1 동아줄 2013.05.04 250
29 '전국 가사.시조 창작 공모전'에서 김태수 씨 장려상 입상 [앵커리지 한인신문 기사 10/30/13] 동아줄 2013.11.01 241
28 제15회 의정부 문학상 수상자 발표 동아줄 김태수 2017.07.10 238
27 우리가 알아야할 수필정석 13 가지 동아줄 2013.02.20 233
26 좋은 시를 위한 자기 점검 동아줄 2015.04.03 231
25 김태수 씨, 전국시조공모전 차상 수상[Korean News 10/21자 기사] 동아줄 김태수 2015.11.11 230
24 새 표준어 항목 동아줄 김태수 2012.02.08 229
23 김태수 씨, 신문논술대회 장려상(Korean News 기사내용, 06/05/2013) 동아줄 2013.06.09 216
22 Korean News 기사-김태수 씨, 낙동강 세계평화문학대상 특별상 수상(9/11/13) 동아줄 2013.09.15 207
21 소재와 표현 동아줄 2013.04.26 197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9
어제:
25
전체:
1,168,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