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수탉

2007.10.19 14:09

이용애 조회 수:589 추천:71


                      할머니와 수탉

                                       이 용 애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에 잠길 때가 있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그 나이에 경험한 일을 기억 해 낼 수 있는 것이란 아주 단편적이고 극히 제한된 것이리라. 그래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가끔 선명한 그림으로 되살아나 나를 추억의 어린 시절로 끌어들인다.
   나는 어려서 유난히 옛날 얘기 듣기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얘기로는 그 무렵 나는 거의 매일 할머니 앞에 바싹 다가앉아 얘기 듣기에 몰두했다고 한다. 할머니 앞에 얼굴을 치켜들고 앉아 얘기를 듣던 내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어머니는 매일  듣는 똑 같은 얘기가 저렇게도 재미있을까?하고  신기하게 여기셨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몇 가지밖에 안되는 자료를 가지고 한번도 귀찮은 내색 없이 어린 손녀가 조를 때마다 얘기를 들려주시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고하셨다.  할머니는 수없이 반복되는 얘기인데도 대충 넘기시려 않고 항상 자세하고 실감나게 얘기를 해 주셨다고 한다.
   내가 한참 옛 얘기에 재미를 들이던 때가 서 너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옛날 얘기가 듣고 싶으면 나는 할머니 손등에 주글주글 덮여 있는 주름을 두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잡아 당겼다가 놓으면서 신호를 보냈다. 겨울철 화롯불에 밤을 묻어 놓고 나서 시작한 얘기가 두어 가지 끝날 때쯤이면 묻혀 있던 밤은 픽!소리를 내며 꿈틀 움직인다. 그러면 할머니는 화 젓가락으로 밤을 찾아내어 뜨거운 것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까 주신다. 그 군밤 맛이 얘기만큼이나 구수하니 좋았었다.
   그 때 할머니가  해 주신 얘기는 콩쥐팥쥐, 심청전, 흥부와 놀부,  장화홍련전, 견우와 직녀, 그리고 제목은 생각이 안 나는 호랑이에게 쫓기는 어린 남매 얘기 등이었다. 무서운 얘기는  숨을 죽인 채 들었다. 또 슬픈 얘기를 들을 때면 눈물을 줄 줄 흘리면서 들었던 생각이 난다. 무서운 대목이 가까워 오면 마른침을 삼키면서 할머니 품속으로 바싹 바싹 다가앉으며 할머니 손을 꼭 붙든다. 할머니는 표정과 음성 손짓으로 실감 있는 얘기를 들려주신 명배우 이셨다. 같은 얘기를 수 없이 되풀이해서 듣고도 싫증이 안 난 것은 할머니의 이 같은 명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내가 조금씩 자라면서 그 얘기들을 조금씩 더 이해를 해 나갔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 같다.
   그 같은 무렵에 내게는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충북 음성군 생극(곤재)에서 내가 살던 집은 초등 학교가 빤히 보이는데 있었다. 아버지가 가르치시는 교실 뒷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또 내가 잘 찾아가던 곳은 기차역이었다. 역 개찰구 옆에 붙어 서서 두 손으로 귀를 꼭 누르고 치익,치익,소리와  함께 기적 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곤 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과수원집에서는 토끼를 여러 마리 길렀는데 토끼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오물오물 풀을 받아먹는 모습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이 잃어버렸다고 애를 태우며 찾아 다니셨다.
   내가 네 살 되던 해 괴산으로 이사를 했을 때 나의 동네 유랑에 문제가 생겼다. 이웃집에서 기르는 닭 중에서 유난히 억세어 보이고 덩치가 큰 수탉이 있었다. 벼슬 색깔도 다른 닭보다 더 붉은 색이었고 꼬리도 검푸른 색에 숱이 많아서 눈에 띄는 놈이었다. 그 수탉이 여러 마리의 다른 닭들과 우리 집 바로 앞 편에 있는, 가을걷이가 끝난 채마밭에 나와 모이를 찾고 있다가 내가 지날라치면 털을 엉크렇게 일으켜 세운 목을 앞으로 길게 뽑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다. 나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뛰어들어가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기겁을 한 내 모양을 보신 할머니가 등뒤에 장대를 감추고 나를 앞세우고는 '내가 그 놈을 혼내 줄 테니 앞서거라.'하시며  나를 재촉하신다. 나는 겁은 나면서도 할머니의 장대를 믿고 놈을 혼내 주고 싶은 마음에 앞서서 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틈에 나를 발견한 그 놈이 또 기세 등등하게 달려온다. 기회를 놓칠세라 할머니가 긴 장대로 내려치면 그 놈은  그만 꼭!꼭! 소리를  지르며 껑충 뛰어 올랐다가 도망치고 만다. 나는 고것  봐라, 혼났지!하고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놈은 그후에도 몇 번이나 나를 놀라게 해서 번 번히 할머니한테 혼이 나곤 하다가, 얼마 후부터는 보이지 않게 되어 나의 동네 유랑은 아무 지장 없이 다시 계속 되었다. 그 후 나는, 다른 수탉들도 곁에 같이 있었는데 왜 그 놈만 내게 그렇게 공격적이었는지 생각하면서, 아마도 그 놈은 사람도 공격 할 수 있다는 위세를 무리 중에 과시하기 위해서 어린 나를 대상으로 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놈은 비록 금수일망정 얼마나 영리하고 또한 괘씸한 놈인가.
그 이듬해 할머니는 환갑을 넘기 신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 우리와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나는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통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이제부터 옛날 얘기는 누가 해 주나! 수탉이 또 나오면 어떻게 해!'하며 종일 울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철이 좀 든 후에 어머니 한 테서 들었을 때, 나도 알 수 없는 눈물이 또 다시 고여 왔다.
   요즈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놓고 손자 손녀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나도 손자들에게 할머니가 내게 해 주신 것처럼 그들을 괴롭히거나 겁을 주는 위험한 수탉이 나타날 때는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둘러 혼을 내서 쫓아 버려야겠다. 또 할머니만큼 재미있게 옛 얘기를 해 주고도 싶다.
   요즈음 아이들이야 얼마나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고 참여 할 것이 많은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유익하고 흥미를 돋아 줄 것을 찾아내어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줄 생각이다. 그리고 가끔은 할머니처럼 명연기로 옛이야기를 들려주려면 표정 음성 손짓 몸짓 등의 효과를 살려 얘기를 하는 연습도 열심히 해 두어야 하리라. 시간에 쫓기며 사느라 내 아이들에게 못 해주었던 몫까지 손자 손녀들에게 모두 해 주고 싶다.
     이 마음이 가고 안 계신 할머니께 대한 내 조그만 보답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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