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삼월 하늘 아래서

2007.10.22 14:18

이용애 조회 수:638 추천:81

                 LA의 삼월 하늘 아래서
                                                                                                          이 용 애
                                              
   창밖에 터지는 산뜻한 새 소리에 잠이 깼다. 아! 드디어 비가 멈췄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비가 말끔히 개었다. 뒤늦게 시작한 우기(雨期)가 삼월에 들어와서까지 계속 되는 동안, 추적거리는 빗소리만 듣던 창가에, 돌아온 새소리가 무척 반갑다.
   오랜만에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맑은 공기가 가슴 속 까지 밀고 들어온다. 문을 열고 뒤뜰로 나섰다. 비에 깨끗이 씻긴 3월 하늘이 날아 갈듯 파릇이 떠 있다. 참새 한 무리가, 꽃이 떨어져 있는 동백나무 아래서 요리조리 옮아앉으며 분주하게 지저귄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니 후루룩 날아, 키 큰 감귤 나무 위로 들어가 숨는다.
   새들을 쫓던 내 시선을, 담 밑에 자리잡은 활련이 끌어당긴다. 이번 비를 맞고 눈에 띄게 웃적 자란 잎들이 싱그러운 손짓으로 인사를 한다. 연꽃잎을 닮은 둥그스름한 잎이 어린아이 손바닥 만큼씩이나 크게 자라서, 가운데에 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을 굴리며 말갛게 나를 쳐다본다. 그들의 풋풋한 미소가 내 가슴으로 찌릿하게 퍼진다.
   다섯 개 이상의 조그만 꽃잎이 모여 작은 나팔 모양을 이룬 꽃이 저마다 얼굴을 쳐들고 반긴다. 아직은 여기저기 잎 사이로 조금씩 보이지만, 좀 있으면 지금 탐스럽게 달린 봉오리들이 모두 펴서 담 밑을 빈틈없이 꽉 채우겠지! 그리고 신이 나서 나를 향해 꽃나팔을 합창해 줄 것이다!
  칠 팔 년 전 일이다. 누가 심지도 않은 활련 두 포기가 담 밑 자갈 틈에 돋아났다. 활련이 한국에만 있는 꽃인 줄 알았던 나는 옛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주황색과 노랑꽃이 퍽 예뻤다. 어린 시절 뒤뜰에 곱게 피던 활련이 찾아온 것 같아 가슴이 따뜻했다. 그리고 해마다 씨를 받아 두었다가 이른봄에 심고 가꾸시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도 활련꽃 위로 피어올랐다.
   이듬해부터 해마다 떨어진 씨가 다시 싹이나 점점 무성해 갔다. 한국에서는 늦은 봄에 피던 꽃이, 겨울이 춥지 않은 이곳 LA에서는 정월, 이월부터 자라기 시작해서 삼월부터 사월까지 함빡 펴, 꽃 자랑을 한다. 활련은 너무 정성을 들이면 오히려 잘 안된다고 한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는 뜻인것 같다. 이 곳에선 심지도 않고 걸음도 주지 않은 채 그냥 놔두면 해마다 떨어진 씨가 싹이 나서 자란다.
   너무 햇빛이 강한 곳 보단 약간 서늘 한곳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엔 두 가지 색이던 꽃이 이젠 진한 자주색과 빨강까지, 네 가지 색의 꽃이 핀다. 지나던 새가 씨를 물어다 놓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유전인자의 변이를 일으켜 색깔이 다른 것이 나왔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내 몸 위로 기어오르기라도 할 듯이 뻗어 나온 활련 넝쿨을 거두어 주면서, 이젠 고인이 된 옆집 백인 부인의 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어느 봄날 오후였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 해서 활련을 돌보고 있을 때, 옆집 미세스'하워드'가 담장 너머로 넘겨다보며 "뷰디풀! 그 꽃이 그렇게 많이 모여서 피니까 참 아름답군요! 하나씩 필 때는 잘 몰랐는데!"하고  탄성을 발한다. 좀 나누어 줄 터이니 심어 보라고 권하는 내게, 자기는 여기서 날마다 넘겨다보면서 충분히 즐기고 있다고 사양한다.
  그 부인은 이십 이년 전 우리가 처음 이사올 때부터 이웃이었다. 부부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과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나빠서, 몸이 보기에 안쓰럽도록 말라 있었다. 아들이 아리조나에 있는 대학으로 떠나고 난 뒤로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종일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가정 치료사가 가끔 다녀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쩌다 오며 가며 마주칠 때는 환자 같지 않게 밝은 표정으로 다정한 말을 걸어온다.
   그런 그녀에게 더 큰 어려움이 닥쳤다. 재작년 가을 남편이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오랜 당뇨병을 앓고 있던 그에게, 다리에 난 상처가 상해 들어가는 무서운 합병증이 왔다. 그 소식을 듣고 꽃과 한국 배를 좀 사 들고 찾아갔다. 거실에 들어서니 내외가 TV에서 한국 연속 방송극 "정 때문에"를 보고 있었다. 미스터 하워드에게 얼마나 통증이 심하냐고 인사를 하니, 붕대로 감은 다리를 보여주고는 연속극이 재미있어 통증을 잠시 잊고 있다며  웃는다. 그들은 영어 자막이 나오는 한국 연속극을 벌써 몇 편째 흥미 있게 보고 있다면서 자랑한다.
   다리가 잘린 고통 속에서도 웃고 농담을 할 여유가 있는 그는, 꿋꿋이 잘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부인이 앙상하게 마른 얼굴을 활짝 펴고, 이젠 자기가 남편의 간호사가 됐다며 남편의 약도 자기가 사 왔노라고 약봉지를 보여준다. 늘 남편의 도움을 받던 그녀가 오히려 남편을 도와야 할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런 그들이 지난해 3월, 같은 시기에 너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인이 먼저 떠나고 나서 남편을 너싱홈으로 옮겼는데, 그도 며칠만에 가고 말았다. 두 사람이 다,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엔 너무 힘이 들어서, 그렇게 서둘러서 함께 떠나고 말았는가!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세상을 뜬 후에야  소식을 알게 된 나는, 두 사람이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할 때 좀더 따뜻한 위로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음이 아팠다..
   내가 가져다준 한국 배가 아주 달고 맛이 있었다며, 힘줄이 내 비치는 얼굴에 미소를 담던 그녀가 활련 포기 위로 떠오른다. 금년부터는 활련이 곱게 펴도 담 너머로 보아줄 그녀가 없어서 나를 쓸쓸하게 한다. 하지만 고통 없는 하늘 나라에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내리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던 활련 꽃을, 통증 없이 편한 마음으로 내려다 볼 수 있으려니 생각을 고쳐서 해본다.
   비 개인 LA의 삼월 하늘은 싱그럽다. 내겐, 뒤뜰을 가득 채워 주는 고향의 꽃 활련이 있어 더욱 생기 넘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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