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신음 소리가

2007.10.26 05:58

이용애 조회 수:652 추천:68

   그 날의 신음 소리가

                      이 용 애

해마다 고국땅이
흰 눈으로 덮이는 겨울이 오면
그 날의 꺼져 가던 신음 소리가
내 안의 어느 뼈 속에서
다시 들려 온다

1951년 1월
중공군으로 오인된
죄 없는 피난민들, 유엔군이
공중에서 쏘아 대는 기총소사 맞고
타는 석양빛에 검불되어 쓰러져 갔다
오산 병점 국도 위에서

살아나려고 뛰어내린 논바닥에
새빨간 절규만 흰눈 위에 쏟아 놓고
처참하게 숨을 거둔
억울한 주검들이 즐비하게 누웠다

이튿날 아침
밤사이 얼어서 되살아난 눈 위에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뽀드득 뽀드득 밟으며
어른 손을 꼭 잡은 어린아이들
무서움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끝없이 널린 시체를 뛰어넘어
한 발짝이라도 빨리 남쪽으로 가야 했다

그 때, 아직도 코를 쏘는
화약 냄새를 타고 들려 오던
가냘픈 그러나 간절한 여인의 신음소리
얼어붙은 긴 겨울밤을 지새우고도
살아남은 질긴 목숨이
끊겼다 다시 들리곤 했다

살기를 애타게 호소하던
간절한 부르짖음이
어느 시체 더미에서 나는지
뒤돌아볼 엄두도 못 내는 아이들은
말없이 걷는 어른들의 눈치만 살폈다
혹시 어른은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 당장 끓여 먹을 양식과
추위를 피해 줄 이부자리를 이고 지고
아이들의 손을 꽉 움켜 쥔 그 손으로는
죽어 가는 생명의 마지막 절규에도
귀먹어리 일 수밖에 없었다

하얀 입김을 연상 뿜어내며
시체를 더듬더듬 피해서 걷는
겁에 질린 어린 귀에
신음 소리가 자꾸 따라왔다
그 날밤 잠자리에까지 따라왔다
그 겨울 내내 들려 왔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마다 겨울이 되면
끊길 듯이 계속되는 신음 소리가
다시 들려 온다
내 안의 어느 뼈 속에서 들려 온다

-- < 문학세계 > 99 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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