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2009.01.14 14:34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의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나'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려지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기어코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의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나'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려지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기어코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 박영숙영 | 2020.01.10 | 85 |
공지 | 님들께 감사합니다 | 박영숙영 | 2014.02.14 | 190 |
공지 |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 박영숙영 | 2013.02.22 | 247 |
73 | 석류의 말/ 이해인 | 박영숙 | 2010.02.25 | 439 |
72 |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 박영숙 | 2009.11.03 | 437 |
71 |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 박영숙 | 2009.12.09 | 437 |
70 | 광야/이육사 | 박영숙 | 2009.01.14 | 436 |
69 |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 박영숙영 | 2011.02.20 | 433 |
68 |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 박영숙 | 2010.02.17 | 432 |
67 | 어떤 관료 - 김남주 | 박영숙영 | 2011.02.28 | 428 |
66 |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 박영숙 | 2009.11.13 | 427 |
65 |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 박영숙영 | 2010.12.22 | 426 |
64 | [스크랩] 속옷/김종제 | 박영숙영 | 2011.04.04 | 425 |
63 |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 박영숙영 | 2012.01.21 | 423 |
62 | 귀천/천상병 | 박영숙 | 2009.01.14 | 418 |
61 |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 박영숙영 | 2011.04.27 | 415 |
60 | 도 종 환/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할 표현들 | 박영숙 | 2009.11.13 | 413 |
59 | 빈집/기형도 | 박영숙 | 2009.01.14 | 410 |
58 | [스크랩]ㅡ가을에/정한모 | 박영숙영 | 2011.03.23 | 407 |
57 | 이해인/존재 그 쓸쓸한 자리 중에서 | 박영숙영 | 2011.09.16 | 406 |
56 |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 박영숙 | 2009.01.14 | 406 |
55 | [스크랩] 황홀한 고백 /이해인 | 박영숙영 | 2010.11.30 | 403 |
54 | 호 수 /정지용 | 박영숙영 | 2010.11.30 | 402 |
53 | [스크랩] 우정/이은심 | 박영숙 | 2009.11.13 | 397 |
52 | 가을에게 | 박영숙 | 2009.11.03 | 395 |
51 | [스크랩]ㅡ불밥/김종제 | 박영숙영 | 2011.01.30 | 386 |
50 | 고갈비/최삼용(바브 | 박영숙영 | 2011.06.03 | 381 |
49 | 스크랩 ㅡ가정/ 박 목월 | 박영숙영 | 2011.03.23 | 381 |
48 | 스크랩 ㅡ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U. 샤퍼 | 박영숙영 | 2010.11.30 | 379 |
47 |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 펌글 | 박영숙 | 2009.03.11 | 368 |
46 | 스크랩 ㅡ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용혜원 | 박영숙영 | 2010.11.30 | 366 |
45 | No Title 무제/ 신규호 | 박영숙영 | 2013.05.30 | 362 |
44 | [스크랩] 꽃피우기/도종환 | 박영숙영 | 2011.04.27 | 359 |
» | 김춘수 '꽃' /출처 다움고요 | 박영숙 | 2009.01.14 | 359 |
42 | [스크랩]ㅡ그리워 한다는 것은/이효텽 | 박영숙영 | 2011.03.23 | 358 |
41 | 목마와 숙녀/박인환 | 박영숙 | 2009.01.14 | 356 |
40 | 문학서재 입주를 축하! 환영! | 종파 이기윤 | 2008.11.30 | 356 |
39 | [ 스크랩]가끔은 애인같은 친구 | 박영숙 | 2009.08.27 | 356 |
38 | 용서 / U.샤펴 지음 | 박영숙 | 2010.06.09 | 356 |
37 | 사슴/노 천 명 | 박영숙 | 2009.01.14 | 354 |
36 | 스크랩 ㅡ 그대는 꿈으로 와서/-용혜원- | 박영숙영 | 2011.02.17 | 354 |
35 | [스크랩] 참 좋은 당신 /김용택 | 박영숙영 | 2010.11.30 | 353 |
34 | moon sails out / 달이 떠오르니 | 박영숙영 | 2014.02.05 | 351 |
33 | 묵화(墨畵)/김 종 삼/출처 다움고요 | 박영숙 | 2009.01.14 | 351 |
32 | 한 잎의 여자 /오규원 | 박영숙 | 2009.01.14 | 349 |
31 | [스크랩}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박영숙 | 2009.09.28 | 346 |
30 | 스크랩 ㅡ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 박영숙영 | 2010.11.30 | 346 |
29 | ♡*미주문학동네 입주 환영*♡ | 잔물결(박봉진) | 2008.10.05 | 345 |
28 | '풀'/ 김수영 | 박영숙 | 2009.01.14 | 343 |
27 | 성탄절 | 이주희 | 2008.12.20 | 339 |
26 | 저녁눈 /박 용 래 | 박영숙 | 2009.01.14 | 336 |
25 | 동천 /서정주/출처 다움 고요 | 박영숙 | 2009.01.14 | 335 |
24 | [스크랩] ▶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 박영숙영 | 2010.12.13 | 335 |
23 |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 박영숙 | 2009.01.14 | 334 |
22 | 편지 / 김 남조 | 박영숙 | 2010.07.01 | 333 |
21 |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 박영숙 | 2009.01.14 | 332 |
20 | 남해금산 /이성복 | 박영숙 | 2009.01.14 | 332 |
19 | 동반자/ Companionship | 박영숙영 | 2012.01.11 | 329 |
18 | 부화孵化 / 김종제 | 박영숙영 | 2010.12.10 | 329 |
17 | 스크랩 ㅡ사랑 /정호승 | 박영숙영 | 2010.11.30 | 328 |
16 | 근원설화 ㅡ김종제ㅡ | 박영숙영 | 2011.07.16 | 327 |
15 | 스크랩 ㅡ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브라우닝 | 박영숙영 | 2010.11.30 | 325 |
14 | 스크랩 ㅡ좋은글 ㅡ하얀 겨울이 그립습니다 | 박영숙영 | 2010.12.02 | 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