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2009.01.14 14:38

박영숙 조회 수:332 추천:108

애송시 100편 - 제7편]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정끝별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7
133 When You are Old 그대 늙었을 때/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1819
132 비스와바쉼보르카 / 두번은 없다 박영숙영 2019.03.24 1302
131 [스크랩] 꽃잎 인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1209
130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 번역:피천득 박영숙영 2012.01.21 866
129 들길에 서서 - 신석정 박영숙 2009.07.10 857
128 그날이 오면/심훈 박영숙영 2012.03.12 809
127 행복/유치환 박영숙영 2011.02.21 798
126 동지 팥죽의 유래 박영숙 2009.12.23 779
125 길 잃은 날의 지혜/박노혜 박영숙 2009.11.18 773
124 When death comes 죽음이 오면 / 메어리 올리버 박영숙영 2014.02.05 767
123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박영숙 2009.07.10 764
122 초 혼 (招魂)- 김소월 - 박영숙 2009.07.10 753
121 Drinking Song 술 노래 /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734
120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7
119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박영숙영 2012.03.12 704
118 푸쉬킨(Alexandr Sergeevitch Pushkin) (1799.6.6~1837.2.10) 박영숙영 2011.04.27 700
117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116 사슴/노천명 박영숙영 2012.03.12 660
115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14 서릿발/ 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2.07 631
113 "시" '아네스의 노래'/영화 <시 詩>가 각본상을 박영숙영 2011.02.28 616
112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111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110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109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108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8
107 마음 /김광섭 박영숙영 2012.03.12 581
106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105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104 I have a rendezvous with Death 나는 죽음과 밀회한다 박영숙영 2014.02.05 564
103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102 꽃/박두진 박영숙영 2012.03.12 542
101 바위 /유치환 박영숙영 2012.03.12 539
100 [스크랩]ㅡ목단 꽃 그리움/이상례 박영숙영 2011.04.24 534
99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98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97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하늘의 천 박영숙영 2013.02.22 527
96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95 청춘/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박영숙영 2014.10.12 523
94 간(肝)/ 윤동주 박영숙영 2011.03.24 518
93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92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91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90 봄은 간다 / 김억 박영숙영 2012.03.12 510
89 어떤 생일 축하/법정 박영숙 2010.08.31 509
88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도종환 박영숙영 2011.02.28 507
87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504
86 하늘의 천/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1.09.29 498
85 [스크랩]즐거운 편지 /황동규 박영숙영 2010.11.30 487
84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83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82 Dust In The Wind(먼지 같은 인생) -Kansas(캔사스) 박영숙영 2014.02.07 477
81 하루의 길 위에서 /이해인l 박영숙영 2011.07.06 475
80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79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78 The Moon / 신규호 박영숙영 2013.12.19 455
77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76 한 해를 보내며/이해인 박영숙영 2010.12.28 449
75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74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80
어제:
112
전체:
888,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