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2009.01.14 14:52

박영숙 조회 수:334 추천:114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1996년>

***

이 겨울에 사랑이 찾아온 연인들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우선 어렵지가 않다. 쉽고, 리듬이 있어 흐르는 물처럼 출렁출렁한다.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눈이 쌓여 무게가 생기듯이 어느 순간 이 시는 우리들의 가슴께를 누르며 묵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경험에도 '뜻밖의 폭설'은 내린다. 폭설이 내려 우리는 압도되어 이 시 안에 고립된다.

큰 고개를 넘으면서 느닷없는 폭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사실 좀 도발적이다. 우리는 그 불편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못 잊을 사람하고' 폭설에 갇히고 싶다고 말한다. 폭설에 갇히는 것이 고립의 공포로 엄습해오더라도. 사실 사랑만이 실용적인 것을 모른다. 사랑은 당장의 불편을 모른다.

모든 사랑은 고립의 추억을 갖고 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연애편지가 있거든 꺼내서 다시 읽어보라. 연애편지는 고립의 기억, 고립의 문장 아닌가. 둘만의 황홀한 고립. 그러니 사랑에게 고립은 고립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한 기꺼이 고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후일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더라도. 그것이 모든 길을 끊어 놓더라도. 사랑은 은밀하고, 은밀해서 환하다.

문정희(61) 시인은 여고 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다. 백일장 당선시들을 모아서 여고 3학년 때 첫 시집을 냈다. 타고난 재기를 미쁘게 본 미당 서정주 시인이 시집의 서문을 썼고, '꽃숨'이라는 시집 제목도 달아주었다. 그녀는 여성의 지위와 몸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려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한국시사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발언해왔다. 그러면서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의 가치를 활달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왔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라는 그녀의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활동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어보라. 사랑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문태준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7
73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박영숙영 2011.04.27 415
72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8
71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박영숙영 2012.01.21 423
70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박영숙영 2010.12.22 425
69 [스크랩] 속옷/김종제 박영숙영 2011.04.04 425
68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67 어떤 관료 - 김남주 박영숙영 2011.02.28 428
66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65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박영숙영 2011.02.20 433
64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63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62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61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60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59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58 한 해를 보내며/이해인 박영숙영 2010.12.28 449
57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56 The Moon / 신규호 박영숙영 2013.12.19 455
55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54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53 하루의 길 위에서 /이해인l 박영숙영 2011.07.06 475
52 Dust In The Wind(먼지 같은 인생) -Kansas(캔사스) 박영숙영 2014.02.07 476
51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50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49 [스크랩]즐거운 편지 /황동규 박영숙영 2010.11.30 487
48 하늘의 천/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1.09.29 497
47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499
46 봄은 간다 / 김억 박영숙영 2012.03.12 506
45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도종환 박영숙영 2011.02.28 507
44 어떤 생일 축하/법정 박영숙 2010.08.31 509
43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42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41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40 간(肝)/ 윤동주 박영숙영 2011.03.24 518
39 청춘/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박영숙영 2014.10.12 522
38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37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하늘의 천 박영숙영 2013.02.22 527
36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35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34 [스크랩]ㅡ목단 꽃 그리움/이상례 박영숙영 2011.04.24 534
33 바위 /유치환 박영숙영 2012.03.12 539
32 꽃/박두진 박영숙영 2012.03.12 540
31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30 I have a rendezvous with Death 나는 죽음과 밀회한다 박영숙영 2014.02.05 563
29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28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27 마음 /김광섭 박영숙영 2012.03.12 580
26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8
25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24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23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22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21 "시" '아네스의 노래'/영화 <시 詩>가 각본상을 박영숙영 2011.02.28 616
20 서릿발/ 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2.07 631
19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8 사슴/노천명 박영숙영 2012.03.12 659
17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16 푸쉬킨(Alexandr Sergeevitch Pushkin) (1799.6.6~1837.2.10) 박영숙영 2011.04.27 699
1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박영숙영 2012.03.12 701
14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4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4
어제:
66
전체:
885,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