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익은사과/김혜순

2009.01.14 15:10

박영숙 조회 수:532 추천:120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2005년>

***

여름 여치가 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겨울) 구름이 떠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아가였던) 할머니가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는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각의 성찬으로 펼쳐놓고 있다.

백 마리의 여치 울음 소리는 자전거의 바퀴 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쳐진다. 처녀 엄마가 낳은 입양 가는 아가의 뺨은 구름의 차가움으로 전이되고, 그 구름은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로 확장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를 낸다. 차르르차르르(사각사각)!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그때마다 고향 마을만큼이나 큰 사과가 깎인다는 발상과 그 큰 사과를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파내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신다는 발상은 사뭇 상징적이면서 동화적이다.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神)이 돌리는 물레의 실타래에 비견할 만하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차르르차르르 돌던 한 세월이 발갛게 잘 익었겠다. 누군가 고향 마을에서 그 한 세월을 잘 놀다 갔겠다. 껍질이 홀라당 깎인 노르스름한 사과 속살 같았겠다. 군침 가득 돌았겠다. 그렇다면, 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는 '밤낮을 만드시고 이 지구를 세세년년토록 운항하시는' '숫자 나라의 시간 윤전기 노동자인 우리들 앞에서/ 감독을 게을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세상의 모든 달력 공장 공장장님'을 낳은 바로 그 처녀 엄마 아니었을까.

김혜순(52) 시인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려 놓는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최근 유행하는 '환상시'의 대모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7
73 용서 / U.샤펴 지음 박영숙 2010.06.09 356
72 편지 / 김 남조 박영숙 2010.07.01 333
71 어떤 생일 축하/법정 박영숙 2010.08.31 509
70 저무는 꽃잎/도종환 박영숙영 2010.09.24 283
69 꽃잎/도종환 박영숙영 2010.09.24 323
68 가을 오후 / 도종환 박영숙영 2010.11.11 304
67 사랑은/김남주 박영숙영 2010.11.30 271
66 호 수 /정지용 박영숙영 2010.11.30 402
65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500
64 [스크랩]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박영숙영 2010.11.30 293
63 [스크랩] 황홀한 고백 /이해인 박영숙영 2010.11.30 403
62 [스크랩] 참 좋은 당신 /김용택 박영숙영 2010.11.30 353
61 [스크랩]즐거운 편지 /황동규 박영숙영 2010.11.30 487
60 스크랩 ㅡ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U. 샤퍼 박영숙영 2010.11.30 379
59 스크랩 ㅡ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박영숙영 2010.11.30 346
58 스크랩 ㅡ사랑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328
57 스크랩ㅡ이제는 더이상 헤매지 말자 /바이런 박영숙영 2010.11.30 302
56 스크랩 ㅡ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용혜원 박영숙영 2010.11.30 366
55 스크랩 ㅡ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브라우닝 박영숙영 2010.11.30 325
54 스크랩 ㅡ좋은글 ㅡ하얀 겨울이 그립습니다 박영숙영 2010.12.02 323
53 부화孵化 / 김종제 박영숙영 2010.12.10 329
52 [스크랩] ▶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박영숙영 2010.12.13 335
51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박영숙영 2010.12.22 425
50 한 해를 보내며/이해인 박영숙영 2010.12.28 449
49 [스크랩]ㅡ불밥/김종제 박영숙영 2011.01.30 386
48 서릿발/ 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2.07 631
47 스크랩 ㅡ 그대는 꿈으로 와서/-용혜원- 박영숙영 2011.02.17 354
46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박영숙영 2011.02.20 433
45 행복/유치환 박영숙영 2011.02.21 797
44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도종환 박영숙영 2011.02.28 507
43 어떤 관료 - 김남주 박영숙영 2011.02.28 428
42 "시" '아네스의 노래'/영화 <시 詩>가 각본상을 박영숙영 2011.02.28 616
41 [스크랩]ㅡ그리워 한다는 것은/이효텽 박영숙영 2011.03.23 358
40 [스크랩]ㅡ가을에/정한모 박영숙영 2011.03.23 406
39 스크랩 ㅡ가정/ 박 목월 박영숙영 2011.03.23 381
38 간(肝)/ 윤동주 박영숙영 2011.03.24 518
37 [스크랩] 속옷/김종제 박영숙영 2011.04.04 425
36 [스크랩]ㅡ목단 꽃 그리움/이상례 박영숙영 2011.04.24 534
35 [스크랩] 꽃피우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359
34 푸쉬킨(Alexandr Sergeevitch Pushkin) (1799.6.6~1837.2.10) 박영숙영 2011.04.27 700
33 [스크랩] 꽃잎 인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1209
32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박영숙영 2011.04.27 415
31 고갈비/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6.03 381
30 하루의 길 위에서 /이해인l 박영숙영 2011.07.06 475
29 근원설화 ㅡ김종제ㅡ 박영숙영 2011.07.16 327
28 이해인/존재 그 쓸쓸한 자리 중에서 박영숙영 2011.09.16 406
27 하늘의 천/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1.09.29 498
26 동반자/ Companionship 박영숙영 2012.01.11 329
25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박영숙영 2012.01.21 423
24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 번역:피천득 박영숙영 2012.01.21 861
23 그날이 오면/심훈 박영숙영 2012.03.12 807
22 꽃/박두진 박영숙영 2012.03.12 540
21 사슴/노천명 박영숙영 2012.03.12 659
20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박영숙영 2012.03.12 703
19 봄은 간다 / 김억 박영숙영 2012.03.12 510
18 바위 /유치환 박영숙영 2012.03.12 539
17 마음 /김광섭 박영숙영 2012.03.12 580
16 Duskㅡ황혼 박영숙영 2012.08.22 300
15 Drinking Song 술 노래 /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733
14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하늘의 천 박영숙영 2013.02.22 527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0
어제:
77
전체:
887,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