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이육사

2009.01.14 15:13

박영숙 조회 수:436 추천:116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39년>  

***

시집 한 권으로 '현대시 100년'에 길이 남은 시인들이 많다. 김소월과 한용운과 김영랑이 그렇다. 특히 유고시집 한 권으로 길이 남은 시인들도 있으니, 이상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여기 이육사(1904~1944) 시인이 그렇다.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이 따라 다닌다. 지사(志士), 독립투사, 혁명가,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의열단 단원 등.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가 264(혹은 64), 이를 '대륙의 역사'라는 뜻의 한자 '육사(陸史)'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항일운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단지 17회 정도 감옥을 들락거리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 만주·북경 등지를 부단히 왕래했다는 것, 북경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것 정도.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인지 안 들렸다는 것인지, 초인이 있을 거라는 것인지 초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는 사람이 초인인지 나인지, 초인을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노래를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왜 천고(千古)의 뒤에야 오는 것인지 해석 이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도 이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이 처음 열렸던 날부터 다시 천고 후까지, 휘달리던 산맥들도 범하지 못했으며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어준 이곳! 이 신성불가침의 시공간 속에서 흰 눈과 흰 말(馬), 매화 향기와 초인의 이미지는 돌올하다. 특히 까마득한 날부터 천고 뒤로 이어지는 대서사적 시제와 감탄하고 묻고 명령하는 극적인 어조 속에서 '광야'의 고결한 미감과 강렬한 정서는 한결 고무된다. 웅대하다는 말, 장엄하다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는 시도 드물 것이다.

감옥에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시 '꽃'에서도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라고 노래했다. 오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이 광야에서, 지금-여기의 눈보라 치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찬란한 꽃을 피울 미래의 그날을 떠올려본다. 시인이 기꺼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이유일 것이다. 기름을 바른 단정한 머리에 늘 조용조용 말하고 행동했다는, 올곧은 시인이 올곧은 삶 속에서 일구어낸 참 올곧은 시다. [정끝별 시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5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7
73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박영숙영 2011.04.27 415
72 귀천/천상병 박영숙 2009.01.14 418
71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박영숙영 2012.01.21 423
70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박영숙영 2010.12.22 425
69 [스크랩] 속옷/김종제 박영숙영 2011.04.04 425
68 [스크랩]인생의 그리운 벗 박영숙 2009.11.13 427
67 어떤 관료 - 김남주 박영숙영 2011.02.28 428
66 {스크랩}봄비 같은 겨울비 박영숙 2010.02.17 432
65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박영숙영 2011.02.20 433
» 광야/이육사 박영숙 2009.01.14 436
63 [스크립]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박영숙 2009.12.09 437
62 나뭇잎 하나가/ 안도현 박영숙 2009.11.03 437
61 석류의 말/ 이해인 박영숙 2010.02.25 439
60 [스크랩/인생은 자전거타기 박영숙 2009.12.09 444
59 [스크랩] 안부 박영숙 2009.11.13 445
58 한 해를 보내며/이해인 박영숙영 2010.12.28 449
57 스크랩] 어느 봄날의 기억 박영숙 2009.04.23 451
56 The Moon / 신규호 박영숙영 2013.12.19 455
55 청 산 도(靑山道)- 박두진 - 박영숙 2009.07.10 456
54 산정묘지/조정권 박영숙 2009.01.14 473
53 하루의 길 위에서 /이해인l 박영숙영 2011.07.06 475
52 Dust In The Wind(먼지 같은 인생) -Kansas(캔사스) 박영숙영 2014.02.07 476
51 [스크랩]삶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라 박영숙 2009.09.28 481
50 시와 언어와 민중 의식 (한국문학(韓國文學) 소사 에서) 박영숙 2009.08.20 483
49 [스크랩]즐거운 편지 /황동규 박영숙영 2010.11.30 487
48 하늘의 천/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1.09.29 497
47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499
46 봄은 간다 / 김억 박영숙영 2012.03.12 506
45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도종환 박영숙영 2011.02.28 507
44 어떤 생일 축하/법정 박영숙 2010.08.31 509
43 푸른곰팡이 산책시 /이문재 박영숙 2009.01.14 514
42 가을비/- 도종환 - 박영숙 2009.07.10 516
41 대설주의보/최승호 박영숙 2009.01.14 517
40 간(肝)/ 윤동주 박영숙영 2011.03.24 518
39 청춘/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박영숙영 2014.10.12 522
38 낙 엽 송/황 동 규 박영숙 2009.11.03 527
37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하늘의 천 박영숙영 2013.02.22 527
36 잘익은사과/김혜순 박영숙 2009.01.14 532
35 어머니의 손맛 박영숙 2009.12.23 532
34 [스크랩]ㅡ목단 꽃 그리움/이상례 박영숙영 2011.04.24 534
33 바위 /유치환 박영숙영 2012.03.12 539
32 꽃/박두진 박영숙영 2012.03.12 540
31 그 날이 오면 - 심 훈 - 박영숙 2009.07.10 546
30 I have a rendezvous with Death 나는 죽음과 밀회한다 박영숙영 2014.02.05 563
29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박영숙 2009.01.14 569
28 직지사역/ 박해수 박영숙 2009.12.16 576
27 마음 /김광섭 박영숙영 2012.03.12 580
26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박영숙 2009.07.10 588
25 봄은 간다- 김 억 - 박영숙 2009.07.10 597
24 새벽 /설램과 희망을 줍는 기다림 박영숙 2009.08.13 608
23 박노해/ "나 거기 서 있다" 박영숙 2009.11.13 609
22 산문(山門)에 기대어/송수권 박영숙 2009.01.14 612
21 "시" '아네스의 노래'/영화 <시 詩>가 각본상을 박영숙영 2011.02.28 616
20 서릿발/ 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2.07 631
19 겨울바다/김남조 박영숙 2009.01.14 652
18 사슴/노천명 박영숙영 2012.03.12 659
17 울긋불긋 단풍을 꿈꾸다 박영규 2009.10.25 695
16 푸쉬킨(Alexandr Sergeevitch Pushkin) (1799.6.6~1837.2.10) 박영숙영 2011.04.27 699
1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박영숙영 2012.03.12 701
14 님의친묵/한용운 박영숙 2009.01.14 714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6
어제:
66
전체:
885,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