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먹어도 고

2007.02.05 13:28

강숙련 조회 수:481 추천:3

    못 먹어도 고

    강 숙 련

  무릇 노름판은 후끈 달아올라야 재미가 있다. 누군가의 속이 끓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흥이 더 난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못 먹어도 고! 그 소리에 화투판은 점점 무르익는다.

  가족끼리라도 네 것과 내 것이 분명한 처남매부지간이라든가, 동서지간의 판일 때 제 맛이 난다. ‘주머닛돈이 쌈지 돈’이라면 맨송맨송하여 금방 시들해지고 만다. 사실, 근본적으로 노름과 도둑의 심리는 상통하는 데가 있어 속이고 빼앗아야 제 맛이다.

  화투판에서는 끗발과 실력의 절묘한 조화가 그날의 운세를 좌우한다. 끗발 없이 실력과 노력만으로는 살기 힘든 것이 화투의 생리다. 이를 두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 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도 있다. 패를 읽는 차원부터가 다르다. 광이 두개나 세 개가 들면 영락없이 ‘고’를 부르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프로는 그렇지 않다. 광3패는 무조건 쉬는 패다. 잘 해봐야 광 값 주고 나면 손톱 밑에 때 끼는 수고만 있을 뿐이다.

  상대의 내면을 알려면 화투를 쳐보라는 사람도 있다. 교양과 지성으로 감춰둔 본성이 적나라하게 들추어진다나 뭐라나. 용어 또한 원색적이거나 전투적이다. ‘죽어 봐야 저승을 안다’든지, ‘총알이 모자란다.’든지, ‘시어미 죽고 처음’이라든지, 오고 가는 말들이 사뭇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 화투 이야기를 하는 내 입이 걸쭉한 것이 아니라 용어 자체가 그렇다. 화투판에 쓰이는 말은 그래야 더 잘 어울린다.

  화투판에서는 순간적으로 희비가 엇갈리고, 생사의 귀로에서 예기치 않게 기사회생한다. 영락없는 인생의 역전드라마다. 내게 주어진 패와 상대의 손에 감춰진 패, 그리고 바닥에 깔린 패가 얽히고설킨 인생살이 같다.

  흔들고, 설사, 폭탄에 쓰리 고, 피박까지. 이만하면 따블에 따따블이다. 두 배와 네 배, 여덟 배를 쳐서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가 되면 파산이다. 자금이 두둑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돈 놓고 돈 먹기는 화투의 기본 생리다.

  피박을 면하기 위해서는 똥이라도 달게 먹어야 한다. 똥 껍데기 하나의 역할로 개인의 파산뿐 아니라 국난(國難)까지 극복할 수 있다. 비 쌍피와 국화 쌍피까지 잘 관리하면 일타 오피(一打五皮)를 넘어서 일타 육피(一打六皮)의 부를 축적할 수 있다.

  화투판의 법은 정하기대로 간다. 시대의 흐름이나 모인사람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근로기준법(?)에 따른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에 따른 근로의 대가라는 우스갯소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 논리라면 화투치기는 노동이다. 하지만 노름해서 저축한다는 사람 아직 본 적 없다. 언제나 잃고 딴 돈의 손익 계산은 적자 쪽이다.

  손익 계산이라는 말이 나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무슨 일이든 깊이 빠져들어 열중하면 광(狂)이 된다. 이 사람은 화투 광이다. 일주일 치고 하루나 이틀 빼고는 날마다 판을 벌인다. 그래서 자금 관리에 남다른 재치를 가지고 있다. ‘꼴 딸’장부라는 것이 있어서 꼬는(잃는)것과 따는 것을 기록에 남긴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도박꾼은 아니다. 기껏 점에 백 원이나 이백 원짜리 고스톱 판이니 점심 한 그릇씩 먹고 헤어지면 그만인 정도다. 그래도 꼴딸 꼴딸 적어 나가다가 한 달에 한번쯤 결산까지 한다니 웃고 넘기기에는 중증이다.

  그 사람에게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내가 사는 것이 무어 그리 좋으냐고 공박을 해 본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하는 긴장감과 더불어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는 것이 화투라고 대답한다.

  나도 한때 못 말리는 ‘고도리 여사’였다. 오죽하면 ‘고도리 강’이라고 불렀을까. 얼마나 즐거웠던지, 자려고 누워도 천장에 화투장이 어른거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을 하느라고 날 새는 줄 몰랐다. 내 속에 감쪽같이 노름꾼의 기질이 도사리고 있었을까, 끈적거리는 승부 근성이었을까.

  정말, 화투판 같이 인생이 즐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이 어찌 같을 것인가. 지인들의 대소사에 적잖은 부조금을 선뜻 내고, 모임의 식사비나 찻값(茶費)을 서로 내겠다고 다투는 사람들이 화투판의 일, 이백 원에는 얼굴을 붉힌다. 그것이 화투와 인생이 다른 증거다.

  작금에 들어서 내가 고스톱을 치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광 세 개를 들고 슬그머니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까닭이다. 프로가 되지 못할 바에는 이쯤에서 철들기로 했다. 요즘에는 아무도 나를 보고 ‘고도리 강’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인생살이가 막막하다고 느껴질 때는 화투판의 판세를 뒤집듯 행운이 찾아오길 기대한다. 끗발이 되살아나길 바라는 노름꾼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못 먹어도 고!

  환청인 듯 그 소리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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