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찾기

2007.02.07 05:19

한상렬 조회 수:357 추천:11

               미로(迷路) 찾기

                                한상렬 hsy943@hamail.net

  시내 중심가를 걷다보면 때때로 정신이 혼미해진다. 온갖 간판들이 즐비해서다. 저녁나절이면 휘황한 네온 불빛에 늘 지나던 거리가 더욱 생소해진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방향을 상실한 채 미로를 거니는 느낌일 때가 자주 있다. 지나는 사람들마저 온통 생소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듯 하다. 인파로 가득 찬 거리만이 아니다. 문학의 거리도 이와 별 다를 바 없다. 너도나도 문인이란 표찰을 달고 있지만 진정한 작가는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오늘의 작가는 늪 속을 유영하고 있다.”고 했던가. 하나같이 끈적이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정국(政局)이 혼란스럽다. 끝내 대통령이 재신임을 거론하고 나섰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다. 그 후폭풍이 엄청난 파장을 몰아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운 정치판이었다. 경제적 위기에 태풍피해, 이라크 파병 문제 등 현안들이 산적한데 느닷없이 터져 나온 한 마디가 일파만파다. 나비효과도 이만하면 가히 놀랄 일이다. 자고 나면 경악할 소식이 기다린다. 그마저 이젠 단련이 되어 점차 무감각해져 간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충격 효과도 별무(別無) 신통해선가. 초인(超人)을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도 병이 깊어 백방으로 백인을 구해봤자 효험마저 신통치가 않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좀 힘들더라도 목을 길게 늘이고 어둠 속에서 햇살을 기다린다. 역사는 장강(長江)을 이루며 흘러간다.  

  세르반테스는 “진실 그것의 어머니는 역사다. 역사는 시간의 경쟁자, 행위의 보고(寶庫), 과거의 증인, 현재의 표본이고 충고인이며 미래의 상담인이다.”라고 했다. 메나르도 이렇게 적고 있다. “… 진실, 그것의 어머니는 역사이다.” 라고. 그렇다면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라는 말이 성립될 만 하다. 놀랄만한 아이디어다. 이는 역사의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지금  분명한 것은 그 역사가 ‘미로(Labyrinths)’ 찾기인가 싶다. 선택의 가능성이 고갈되어 버린 상태. 이를 존바스(John Barth)는 ‘고갈의 문학’이라고 말했던가. 여기서 ‘고갈’은 외형적, 도덕적 또는 지적 퇴폐처럼 어떤 것이 피곤해진 상태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의 완전소모, 어떤 가능성의 고갈을 말한다. 그렇다고 위기의식만 키울 일은 아닐 것이다. 위기는 곧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일 수 있어서다. 바스의 소생의 문학이 그러하다.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에서 “강이 흐른다. ‘이브와 아담’ 교회를 지나서, 해변의 굽이로부터 만(灣)이 굽어진 곳까지, 널찍한 마을을 한바퀴 돌아 다시 우리를 하우스 성(城)과 엔비론까지 데려오면서.” 라고 읊지 않았는가. 하여 오늘의 문학은 미로 찾기의 나날일 수밖에 없다.  

  늪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전혀 없는가? 고갈의 시대에는 ‘위대한 작품’만이 살아남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기억되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생산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바랄 바다. 그러나 어디 그러한가. 불후의 명작을 남기겠다는 열의는 가상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작고 귀여운, 평범하지만 비범한 조그마한 것들이다. 그런 소박한 것이 오늘 우리를 더욱 매혹시킨다. 이런 것들은 작가나 독자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지 않는다. 나는 『율리시즈』와 『파우스트』를 의무감에서 읽었지만, 『신곡』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일이 여러 번이었다. 그보다는 아주 작은 삶의 이야기들 일테면 모파상의『목걸이』나, 토마스 하디의『귀향』과도 같은 단편들이 오히려 읽기에 부담이 덜했다. 그렇다. 이런 소박한 이야기가 더욱 우리를 즐겁게 하였건만 과욕과 맹신으로 미로에서 헤매는 작가들이 없지 않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원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종종 분노의 휘말리게 한다. 정치적 불의나 부정, 경제적․사회적 불균형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 때론 작가를 위협하고 분노하게 하며 울분을 터뜨리게 하기도 한다. 이 경우 거룩한 분노는 세상을 비판하고 경멸하며 증오하게 한다. 더구나 산업화에 따라 가치관이 변모하고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자연이 파괴되며 환경이 오염된다. 끝내는 인간의 성정마저 난폭해져 간다. 문학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용기일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때로 현실에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가와 작품의 불일치, 도덕과 문학의 불일치, 언어의 자율성 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

  이제 작가의 소명은 뚜렷해진다. 아직도 오만과 편협한 자기만족에 함몰하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작가들이 만(萬)에 하나라도 있다면, 이젠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나 유영(遊泳)해야 할 때다. 그래 농부가 끌고 가는 손수레와도 같은 작품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예술은 삶의 감정의 상승이며 자극이다.”라고 공언했던 니체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설득력을 갖는 때가 아닌가. 진실로 문학의 미로 찾기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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