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고 싶다

2009.11.18 00:52

박영란 조회 수:642 추천:41

수박이고 싶다 / 박영란

수박을 고를 때는 늘 망설여진다. 모양은 먹음직한 과일이지만 겉모양만으로는 맛이 구별되지 않는다. 어느 것을 고를까 뜸을 들이다가 허리를 굽혀서 똑똑 두드려 본다. 수박의 크기만큼 수박의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 가볍게 퉁기듯 다시 내 주먹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있고, 묵직한 느낌으로 수박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듯한 소리도 있다. 나는 소리에도 자신이 없다. 몇 번을 다시 두드리다 보면 이 소리도 저 소리도 다 비슷하게 들린다. 그래서 나의 수박 고르기는 그 날의 재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내가 혼기에 찼을 때 어머니는 길을 가면 총각만 눈에 들어온다고 하셨다. 듬직하고 인물이 훤한 남자를 보면 우선 호감이 생겨 옆으로 닦아가려다가, 순간 ‘아니지, 저 사람 속을 알 수가 없지’ 그렇게 혼잣말을 하시며 돌아섰다는 것이다. 수박 하나 고르는데도 선뜻 골라내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머니는 길에서 사위를 주우려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어머니는 오뉴월의 땡볕에 목이 타 들어가는 심정이었나 보다. 어머니가 정한 기준이 무너져 버렸고, 빈둥거리며 노는 딸년은 시집 갈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답답하고 갈증 나는 판에 누군가가 수박 한 덩이 안겨주면 그것이 바로 최상품의 수박이지 않았을까. 하긴 그런 것 같다. 한 번 먹고 나면 그만인 수박을 고를 때나, 평생 같이 살아야하는 배우자를 선택했던 일도 순간의 결정이었던 것 같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수박을 칼에 대는 순간 ‘쩍’ 하니 소리가 나고 얄팍한 껍질 속에는 진홍의 속살이 감칠 맛나게 익어있다. 그런데도 영 인기가 없다. 연일 비가 내리는 요즘 같은 날이면, 냉장고에 들어있는 수박은 천덕꾸러기다. 펑퍼짐한 아줌마의 모양새처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비좁은 냉장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괜히 성가시다. 그러자 마음 한 곳에서는 ‘수박이 무슨 잘못이야’ 하며 되묻는다. 그렇게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큰 수박통 하나가 쓱 지나갔다. 꼭 그렇게 보였다. 다시 보니 아들이었다.

방학 동안 어딜 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아들이 참 기특하다. 같이 수박을 먹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아들이 사랑스럽다. 어느새 남편보다 더 커버렸는지 그 모습만 보아도 설렌다.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은 냉장고에 있는 수박처럼 성가시다. 친구는 없는지 저렇게 혼자 노는 게 못마땅하고, 먹을 것만 축내고 빈둥거리며 냉장고 문만 여는 아들이 밉상이다. 생긴 얼굴만큼 머릿속과 마음속은 여물어가고 있는지. 속을 모르는 수박처럼 답답하다. 이유 없이 아들에게 구시렁거린다. 어디 수박만 모를 일인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하는 말이 꼭 내 마음 같다. 차분히 집에 있는 것도 때론 심술궂게 보이니,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무엇인가.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양은 없지만 색채는 있는 것 같다. 그 색채는 아마 빨간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겉과 속이 다른 수박처럼 사람들도 가슴에 불덩이 하나씩 안고 있으면서 얼굴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사는 내숭이 아닐까. 얼마 전 국회에서 열렸던 옷 청문회 사건을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커다란 몇 개의 수박덩이가 앉아있었던 것 같다. 증언을 하는 여인들은 때깔 좋은 수박처럼 인생의 완숙기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이 사람의 소리도 저 사람의 소리도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새빨간 거짓말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수박 속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수박이라면 한 통 사서 시원하게 잘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일 나라에 과일들이 모여 정신없이 노는데, 어느 날 해가 사라져버렸다. 놀란 과일들은 누가 해를 먹었느냐며 서로를 의심하며 바라본다. 그러나 덩치 큰 수박은 덤덤히 가만히 있다. 이 때 어느 과일이 ‘수박이 해를 먹었다’라고 소리친다. 놀란 수박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수박은 자신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반쪽이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빨간 둥근 해가 들어있었다. 과일 나라에 있었던 동화 이야기다. 수박은 왕따를 당했을까? 죄 없는 수박을 나는 무슨 까닭으로 오늘 도마에 올리는가.

겉과 속이 다르다고 수박을 엉큼형이니 내숭형이니 말하지 말자. 수박은 쌀 톨 만한 씨로 보름달 같이 여무는 실속형이다. 나도 가슴에 까만 씨 하나 품은 시원한 맛을 내는 수박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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