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 유감

2007.02.07 11:05

하길남河吉男 조회 수:168 추천:7

                연하장 유감


                                  하길남 河吉男

“돌 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그렇게/ 맑게.”

이 글은 어느 시인이 한지(漢紙)에 손수 붓 글로 쓴 연하장 내용이다. 이렇듯 우리는 새해를 맞아 잊지 못할 여러 정든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한다. 우체국이나 시중에서 만들어 놓은 연하장을 사서 보내는 이도 있고, 서투른 솜씨나마 자기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보내는 이도 있다. 이때는 한껏 자기의 솜씨를 뽐내보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손수 그린 연하장들을 훑어보니 난을 친 것과 크래용으로 그린 것, 꽃이나 클로버 낙엽 등을 말려서 손수 쓴 연하장에 붙인 것 이외 탁본을 한 것, 깨알 같은 글로 기나긴 사연들은 적어놓은 것, 두꺼운 색종이를 오려서 그림을 만든 것 등 갖가지 모양의 연하장들이 시선을 끌고 있다. 이들 그림을 그릴 때 그들의 정성들은 생각해 보면서 차라리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아름다운 마음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 것인가. 받는 이와의 우정의 깊이나 그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구구절절 정다운 얘기들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있다.

  “꿈에 그린 매화 한 점 맞선 보듯 드리나니...”

그렇다. 이 글은 시인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마음인가, 정성인가, 그리움인가, 애틋함인가, 하느님의 입김인가, 꽃이 피는 소리인가, 구름이 흐르다 흘린 사리(舍利)인가. 이 말 한마디가 명치끝에 삼삼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름다운 말의 결정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하기 때문이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안도현의 시다. 우리는 누구에게라도 한 번쯤 뜨거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렇지 못하다면 차가운 방을 따뜻하게 지펴주는 연탄재보다 나을 것이 뭐 있겠는가. 따뜻한 말 한마디, 애정 어린 눈짓 한 번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늘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일 모두 이루소서.”
“복 많이 받으소서.”
“문운(文運) 떨치소서.”
“건필을 빕니다.”
“내내 건투하소서.”

이렇듯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마음들인데 우리가 어찌 한 해의 보람을 소홀하게 넘길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이 넉넉한 인심이면 결코 우리들 한 평생이 외로울 리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성의 운기(運氣)로 하여 세상은 정화되어 우리들은 맑고 밝은 삶을 잇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미국의 여러 대학들이 공동으로 연구 발표한 바에 의하면 기도가 주는 효과는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몇 명의 환자들을 두고 몇 개 그룹에게 그 환자들을 위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한 결과, 그렇지 않는 환자들과는 병세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위암, 십이지장암, 림프암, 관상대동맥경색증 등 무려39가지의 병을 앓고 있던 오혜령 씨는 “몸이 힘들어도 영혼에서 찰랑찰랑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면 다 이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12권 짜리 묵상집을 16일 만에 다 썼다고 했다. 불굴의 신앙과 의지로 이른바 ‘질병 박물관’으로까지 불리던 그녀는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기적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의 의사이며 종교인인 버니 S. 시걸은 자신의 저서 <사랑+의술=기적>에서 ‘환자는 의사와 포옹하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에 3번쯤 포옹한다면 아마 병은 달아나 버리고 말 것이다. 포옹은 숨결과 숨결을 잇고 가슴이 맞닿는 지고한 사랑의 순간이 아닌가. 살인을 저질은 희대의 대도(大盜)를 교화시킨 이해인 수녀는 ‘저가 출소할 때 한 번 수녀님을 힘껏 안고 싶다’고 한 소원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사랑에 굶주렸으면 수녀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애원했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새해를 맞게 되면 이웃들에게 우선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기원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복을 염원해 왔던 것이다. 우리들의 이 기복신앙은 옛 샤머니즘으로부터 비롯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어떤 종교이든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은 곧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바뀌고 만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사실상 별로 없다. 하느님을 위해 기도한다는 취지로 마련된 예배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복을 비는 기복의식으로 변모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모의 과정들을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언제나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복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복조리, 복 주머니는 물론, 베게나 이불, 옷 등에 복복 자(福)를 그렇게 많이 새겨놓았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대문마다 복복 자는 수없이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가 그것이다. 사실 이와 유사한 글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자라면서 동작 하나만 잘못해도 ‘복 나간다’고 꾸중을 듣곤했다. 우리가 연하장을 받는다는 것은 곧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하장을 보내는 일도 복을 기원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하장이란 복을 싣고 나르는 새해의 전령사가 아닌가.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 시대라고 하여 이메일로 연하장을 보내고 있으니 너무 요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판을 두드려보면 가지각색의 수많은 연하장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입맛대로 골라잡아 한 두 번 손가락만 까닥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훌쩍 떠나고 만다. 손수 만든 연하장에 비해 무슨 애틋한 정이 스며들었겠는가. 또 힘께나 쓰는 사람들은 비서에게 명단만 던져주면 연하장은 그들 손에 의해 저절로 오고가는 판이니, 그런 것은 받으나마나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연탄재처럼 뜨거운 연하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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