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지가 된 나무

2007.05.25 08:57

양미경 조회 수:740 추천:51

    연리지가 된 나무  
                        
                        양 미 경

  거실 한 컨에 걸려있는 그림 한 점이 오늘따라 눈길을 끈다. K교수께서‘쳐다만 봐도 금술이 좋아 진다’며 선물로 준 것이다. 초록 잎사귀가 무성한 두 그루의 나무가 차츰 서로의 가지가 맞붙어 마침내 연리지(連理枝)가 되는 그림이다. 그 나무에는 온갖 새들이 깃들여 우주의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얼마 전에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구순을 넘긴 할아버지와 팔순의 병든 할머니. 자식은 여럿 있지만 영감님은 자식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기 싫다면서 두 분만 사셨다. 영감님께서는 수년을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할멈의 식사수발은 물론, 대소변까지 손수 받아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라고 한다.
“네 어미가 막 임종 했다.”

  소식을 들은 자식들은 부라부라 아파트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할머니는 깨끗하게 염을 끝낸 상태였고, 할아버지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자식들을 맞이한 것이다. 영감님은 할멈이 돌아가시자 삶의 의미를 상실한 나머지, 자식들에게 할멈의 죽음을 알린 뒤 자진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노부부의 삶과 죽음의 마무리를 한동안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생명은 아무리 자신의 것이라 해도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될 존엄한 것이며,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늘이 관장하는 것이라는 교육받았다. 그리고 똑같이 후세들에게도 가르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만연할 것이고, 조금만 힘들어도 삶을 마감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생명 경시 풍조는 타인의 생명 역시 가볍게 여기는 풍토를 조성하여 범죄율을 높일 우려도 크다. 그런 저런 연유로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를 잘못된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이리라. 더욱이 노부부의 이런 경우는, 자식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준다는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나는 왜 그 노부부의 마지막 길이 그토록 아름답게 와 닿는 것일까.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눈물나도록 부럽기까지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던 가치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가치가 존재하는 것인가. 설사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과 상충되는 것이라 해도,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또 다른 인간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평생을 서로 사랑하다가 죽는 날 함께 오롯이 이승을 뜨는 그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결혼식장에서‘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주례사에 맹세하며 함께 인생의 광야에 발을 내딛지만 요즘은 혼인서약서에 잉크 빛이 채 바래기도 전에 헤어지는 부부가 급증하고 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파뿌리가 삭을 때까지 함께 하다가 한날한시에 손잡고 이승을 뜬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연리지의 유래를 찾아보았다. 최초로 연리지가 언급된 것은 송나라의 범영이 쓴‘채옹전’이다. 그는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얼마 후 그의 방 앞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마주보면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차츰 두 나무는 서로의 가지가 맞붙어 마침내 연리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연리지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나타내는 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가‘장한가(長恨歌)’에서 당태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읊었다.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두 사람은 은밀한 약속을 하는데/ 우리가 하늘에서 만나면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이승에서 다시 만나면 연리지(連理枝)가 되세….
  
  이후부터 부부간 남녀간의사랑 이야기에 연리지가 인용되었다. 우리 역사 속에도 남녀의 사랑에 한정시키지 않고 때로는 선비들의 우정을 나타내기도 했고, 그 나무에 빌면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는 말까지 생겼다. 특히 연리지는 한쪽 나무의 가지가 죽으면 그 옆의 가지도 따라서 죽는다고 한다. 나는, 함께 이승을 떠난 그 노부부야말로 사랑으로 함 몸이 된 연리지부부지 싶었다.

  그런데 오늘, 그들에 관한 또 다른 말을 전해 들었다. 할머니께서 병사하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할아버지께서……? 인간의 삶은 존엄해야 하고, 죽음 역시 존엄해야한다. 평생을 함께 살다가 같은 날 함께 마무리한 그 노부부를 탓하기 전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더할 수 없는 사랑의 향기를 느꼈다. 누군가 그들의 죽음을 탓하고 싶다면, 인생의 마지막까지 영혼을 다 하여 그들만큼 사랑하고 난 뒤 말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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