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지워가며

2007.05.25 09:01

양미경 조회 수:534 추천:49

     살며, 지워가며  

                       양미경
                          
  ‘신비의 바닷길’이 열린다는 남해의 진-섬으로 갔다. 일행들과 함께 도착한 시간은 정각 12시. 한 시간쯤 있으면 길이 생길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들뜬 안내가 무색하게, 섬과 마을 사이에는 명경처럼 맑고 푸른 바다만 펼쳐져 있었다. 갈매기들이 물을 박차고 날면 잔잔한 파문이 이는 것이, 모세의 지팡이 끝에 갈라지던 기적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30분쯤 지났을까. 정말 믿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섬과의 사이에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이 푸른빛에서 점차 녹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섬 이쪽 끝과 마을 쪽 끝에서 천천히 바닥이 드러나며 긴 길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는 자연산 굴들이 즐비했다. 너 나 없이 쪼그리고 앉아 굴을 깨 먹으며 낄낄거렸다. 어림잡아 200m쯤 섬으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서 푸른 바다가 햇살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 한 가운데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이다.  

  섬 뒤엔 또 하나의 섬이 연결되어 있었다. 금강산 만물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온갖 형상의 바위들. 기암괴석에 한껏 도취했다가 뭍으로 돌아왔다. 잠시 일행과 얘기하다 천천히 돌아보니 이럴 수가! 내 발자국들은 어느새 바닷물에 지워지고 없었다. 무심한 듯 흔들리는 수면 위의 붉은 노을. 순간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듯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던 기억과, 발자국을 찍으며 오갔던 나의 흔적이 순식간에 지워진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아, 언젠가는 내 인생도 삶의 무수한 희로애락도, 저같이 지워지겠지.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것들이 잊혀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기억이 지워진 사람에겐 슬픔도 함께 지워진다.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조차도 저 먼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져 간다는 것을 치매로 거의 기억을 잃어 가는 내 어머니를 보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와 닿은 적은 없었다.

  '모세의 기적'은 몇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흔적을 찍으며 거닐었던 바닷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 길을 지나왔고, 그 이전에도 슬프거나 행복했던 수많은 길을 지나온 내 인생도 언젠가는 지상에서 모두 사라질 것이다.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게 인생이라면,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지금부터는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을 조금씩 지워 가는 지혜를 터득해야겠다. 아름다운 추억은 간직하면서 내 인생이 지워지는 그 날까지 행복한 기억에만 묻혀 살고 싶다. 인생은 짧은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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