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눗방울 세상

2007.06.14 13:12

양미경 조회 수:674 추천:50

      비눗방울 세상

                       양 미 경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두리번거리던 맑은 눈이 금방 푸른 하늘로 향했다. 비스듬히 반사된 가을 햇살이 아이의 활짝 열린 동공에 반사되며 반짝 빛났다. 순간 세 살짜리 꼬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표정엔 무한한 호기심과 기대가 담겨 있다.

  나는 다시 비눗방울을 불어 고사리처럼 작은 손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이는 손바닥위에 얹힌 비눗방울을 신기한 듯 보다가 다른 손으로 잡으려하자 톡 터져 버렸다. 조금 전처럼 눈을 크게 뜨고‘어디로 사라졌을까’며 찾는 모습이 무척 귀엽다. 나는 열심히 손녀 지윤이에게 비눗방울을 만들어주었다. 아이의 눈은 무지갯빛 방울을 따라다녔고, 내 눈은 손녀의 표정을 따라 다녔다.

  며칠 전에 TV에서 비눗방울 마술사라는 외국인이 공연을 했다. 그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사람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비눗방울까지 자유자재로 만들어내어 객석을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크고 작은 비눗방울들이 그의 막대 끝에서 색색의 조명을 받으며 환상처럼 돌고 돌았다.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절대자의 몸짓 같았다. 비눗방울은 눈을 속이는 마술도 아니며 착시도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그 동안 찾지 못했을 뿐, 그는 그것들을 심미안으로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리라.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어릴 적 비눗방울놀이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익숙하고도 즐거운 놀이였던가. 수수깡을 비눗물에 담가 후~하고 불면 작은 물방울들이 허공으로 하늘하늘 날아오르곤 했었다. 바람에 둥실 날아가다가 톡 터지면 다시 불며 쫓아다녔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고,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봤을 땐 사라진 비눗방울처럼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후였다.
    
  비눗방울은 그저 물 풍선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은 늘상 경이롭다. 말간 비눗물이 햇빛을 받아 무지개 빛깔을 연출해 낼 때면 아무리 삶에 찌든 어른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은 눈빛부터 순수해진다. 마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다시 부풀어 올랐다가 순간 사라지는 비눗방울들-.

  어린 시절의 꿈과 어른이 되었을 때의 꿈은 왜 달라지는 것일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꾸며 간직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꿈을 꾸기나 할까. 부모들은 자식에게 따뜻한 세상이 펼쳐진 동화책을 사주지만 정작 어른들은 그 동화를 읽기나 할까.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비눗방울을 불어보니,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련한 시간들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것들은 아주 멀리 두고 온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린 것들이었다. 내 가슴에, 모든 이들의 가슴에 여며둔 지난 추억 속에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날려 보냈던 비눗방울들, 풀꽃 반지, 새벽녘 호박잎사귀에 숨어살던 작은 이슬들…. 그 모든 것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우리의 심연에 분명 살아 숨쉬고 있다.

  어른들이 동화를 읽고 보릿대로 비눗방울을 분다한들 누가 웃으랴! 아이와 함께 비눗방울을 불고 아이와 함께 그 비누방울을 따라 뛰어다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평화스러울 것 같지 않은가. 아무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 적 없다. 허나 우리가 그러지를 못했다. 단지 어른스럽지 못 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도 손녀가 왔다. 나는 정성껏 비누를 깎아 물에 녹인 후 글리세린과 설탕을 조금 넣고 저었다. 지윤이는 기대에 찬 눈망울로 내가 만드는 비눗물을 보고 있다. 아이의 마음속엔 이미 크고 작은 오색물방울들이 하늘 가득 떠다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 가슴에도 수많은 비눗방울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나는 지윤이와 함께 아름다운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작은 비눗방울 하나로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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