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의 고향

2007.11.21 23:20

김용자 조회 수:702 추천:55

  이름이 유람선이지 흔히 보는 나룻배에 동력을 달아 ‘통통선’이 된 초라한 배였다. 그 배에 십여 명이 타고 유람선은 떠났다. 물에 잠긴 고향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은 일찌감치 설레기만 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디인지 설명을 들어야 “아! 거기구나”할 정도로 고향은 이제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여기가 거깁니다” 하는 뱃사공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맑은 물 속 저 깊은 곳에 오백 년을 이어오던 내 고향 마을이 들어 있다. 큰 집들은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겨 앉았지만 한눈에 잡힐 듯 우리 집 골목, 친구네 초가 지붕은 커다란 유리관 속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같이 물 속에 잠겨서 긴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망연히 물 속을 들여다보며 온갖 생각에 잠겼다.
  
  별당 정원에 서 있던 하늘을 찌를 듯 하던 모양 좋던 잣나무는 별채와 수령이 비슷하다고 했으니 족히 오백 년은 넘을 듯 했지만 해마다 잣이 열렸다. 까마득히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잣송이를 따려면 담장 밖 텃밭에서 솜씨 좋게 돌팔매질을 하든가 장작개비를 날리곤 했는데, 그것이 빗나가면 별채 대청 지붕의 기왓장이 벼락을 맞았다. 이런 우리들의 장난 때문에 기왓장은 배겨나지 못했지만, 어른들의 호통 속에서도 놀이 삼아 눈치껏 돌팔매질을 해댔다.

  할아버지 형제 분은 날아갈 듯 풀을 먹인 안동포 고의적삼을 입고 대청에서 바둑을 두셨다. 한 수 위인 우리 할아버지께 점심내기를 거신 분은 큰할아버지셨는데, 지고 나서 결기를 삭이지 못해 바둑판과 바둑알을 마당으로 집어 던지시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돌아서서 그러는 광경이 재미있어 숨죽이며 웃곤 했다.

  사랑 측간은 대낮에도 지나기가 무서웠다. 으슥하기도 했지만 유독 거기만은 귀신 이야기가 많았다. 한낮에도 갓 쓰고 도포 입은 귀신이 사람이 들어가면 슬그머니 없어진다고 했었는데, 그 귀신도 지금은 물귀신으로 변했을까.

  어쩌다 우리 마을에 접어든 낯선 남정과 좁은 길가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른 길섶 한 켠으로 물러서서 몸을 반쯤 외로 돌리고 귀밑 볼을 붉히던 동네 처녀들. 지게다리를 두드리며 구성지게 <한 오백 년>을 불러 제끼면서 산마루를 오르던 코밑이 거뭇하던 숫총각들. 이제는 모두가 흩어졌지만 그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살았던 다정했던 동리 사람들이었다.

  산허리를 감돌아 꼬불거리던 길들도 그대로 물 속에 보인다. 저 길 모롱이에서 낯익은 사람이 불쑥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물동이를 이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새댁의 살랑이는 뒷모습에서 향기도 풍겨올 것만 같은데.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고 지는 앞산과 아버지 형제분만 낳으시고 일찍 돌아가신 할머님의 산소가 있는 정짓골, 봄이면 이곳 무덤 가에는 산당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장례 때만 쓰는 꽃상여를 넣어두는 무서운 상여집도 물 밑 어디쯤에 있겠다.

  물 좋고 반석 좋은 경치 속에 운치 있게 자리잡고 있던 침락정(沈洛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 그 정자는 문화재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지만 그림 같이 아름답던 그 곳도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정자가 있던 낙천이라는 곳에는 바람도 비켜갈 것 같은 수백 년이 넘는 낙락장송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응달지고 음습하던 솔밭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솔갈비가 떨어져 썩어서 두엄처럼 뜨뜻한 그 위에 융단 같은 이끼가 덮여 있었다. 이끼가 적당히 덮일 때쯤이면 할아버지는 아직 달거리를 시작하지 않은 여자아이들을 보내서 송이버섯을 따 오게 하셨다. 송이는 영물(靈物)이기 때문에 누구든 가면 부정을 탄다는 것이다. 솔밭 입구에 들어서면 은근히 풍기던 송진 냄새와 송이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살을 가르며 조금만 더 가면 우리 동네와 읍내 중간쯤에 ‘재인마을’이 있다. 소와 돼지를 잡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가 학교에 가려면 그 곳을 지나야 했다.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을 보면 분명 어른들이 꾸몄을 괴상하고 이상스러운 이야기가 생각나서 무서웠다. 그 쪽 아이들과 접하다 보면 정분이라도 날까 해서 지어낸 이야기였으리라. 그 곳 아이들과 우리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으며 사실 나보다 더 총명하고 좋은 품성을 지닌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놀고 싶어도 칼과 도끼가 생각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른들이 엄격하게 갈라놓은 이쪽 동네와 그쪽 동네도 지금은 똑같은 물줄기가 한데 엮어 삼켜버렸다.

  이따금 소문으로만 들리던 ‘안동다목적댐’ 공사가 구체화되면서 토지보상비라 하여 몇 푼의 돈이 나왔다. 그때야 아무것도 모르고 허둥거리기만 했었다. 세월이 가면서 이렇게 가슴 저미는 향수가 될 줄 마을 사람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두 다리가 허벅지까지 없는 환자를 돌보기 위하여 찾아 다닌 일이 있다. 십여 년 전에 공장 피댓줄에 감겨 겨우 목숨만 살아남은 산업재해자였다. 그는 가끔 잘려나간 다리가 저리고 가렵기가 성했을 때 느끼는 고통과 같다고 괴로워했다.

  이미 없어진 다리가 어떻게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후에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은 일명 ‘도깨비 다리’라고 하는데, 의식 저변에 남아 있는 건강했을 때의 기억이 신경 계통에 자극을 주어서 나타나는 증세라는 것이다. 그 고통은 어쩌면 잃어버린 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통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들녘과 집을 내려다보면서 그 숱한 이야기와 함께 그 집 주인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오백여 년을 쟁기질하며 대대로 내려오던 가난한 동리 사람들에게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목돈이 보상비로 나왔다. 세상 잇속에는 너무나 어두웠던 사람들이 부푼 꿈을 안고 도회지로 나왔을 때, 몇 달을 설렘 속에서 계획했던 꿈은 일시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남은 몇 푼으로 자식이라도 온전히 키우자고 서울로 떠밀려 온 사람들은 막노동으로 그 시골 자존심을 짓뭉개 버리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도시 빈민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어디 내 고향 사람들뿐이겠는가. 어디서 그네들은 고단한 몸을 쉬면서 즐거웠던 그 시절을 꿈꾸고 있을까.

  물에 잠긴 고향 위로 배를 타고 가며 온갖 상념에 잠겨 있는 나를 한때는 명문가를 이루셨던 선대(先代)할아버님들께서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실까.
                                                            199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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