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로제타석

2007.01.31 14:28

박봉진 조회 수:736 추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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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외곽 게트위크 공항에 내릴 때 먼 산허리를 불거스레 물들였던 그 여명의 미소는 면사포에 살짝 가린 로제타석(Rosetta Stone)의 후광이었던 것 같다.

유럽 10개국 순방의 여행객 틈에 끼였던 나는 대영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좌측 맞은편으로 몇 걸음을 걷다말고 무엇에 해를 입을세라 전신에 투명한 천을 두른 채 안온한 간접 조명을 받고 서있는 로제타석(石)과 마주쳤다. 순간 맥박이 빨라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다는 그 박물관엔 미라와 고대 유물 등 주로 정벌국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채워져 있다는데, 박물관 관람을 제대로 하려면 일주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대충 관람하고 그 다음 전시실로 갔지만, 나는 거기에 마음이 빠져 그랬을까. 로제타석의 곁을 좀체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행을 놓쳐버렸지만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기회다 싶어 아예 중도 관람을 포기한 채 그 둘레를 수없이 맴돌며 요모조모를 살피다가 집결지인 후문으로 직행키로 했다.

로제타석은 죽은 제갈량이 조조군사의 눈을 속여 물러나게 한 것에 비견한다면 지각과 우아함이 배어있는 살아있는 삼혼(三婚)의 여걸이라고 해야 올을 것이다. 그 아명(兒名)은 알길 없지만 댁호(宅號)는 그냥 로제타석으로 불리었다. 1799년 나포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에 의해 나일강 어귀 로제타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명성에 비해 키는 작달막했지만 가무잡잡한 현무암 살갗의 마력(魔力)이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원래 그녀는 고대 그리스 장군이 이집트에 들어가서 현존의 신격(神格) 바로의 왕권을 계승한 포틀레마이오스 5세의 애첩으로 간택을 받은 몸이었다.

그래서 신(神)이 하사한 불사의 생명 샘을 비장한 그녀는 실핏줄이 아리아리하게 얼비치는 피하에 신성문자라고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이집트의 민중문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문자를 문신인양 새기고 2천여 년 동안 출가한 그곳에서 주군을 송덕(頌德)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세엔 군웅이 활거하며 절세가인(絶世佳人)을 끌어들이게 마련이 아니던가. 그 가인 또한 군웅의 실세로서 역사의 물꼬를 바꾸곤 하지 않았던가. 로제타석은 근세판 시바 여왕이나 클레오파트라로 환생한 듯 장구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뛰어 용호상박(龍虎相搏)으로 으르렁대던 영국과 프랑스의 연적 사이에 끼였고 양국은 국운을 건 혈투를 벌려야만 했다. 나 같은 범부도 사랑하는 여인을 빼았기지 않기 위해서는 사생결단을 마다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물며 일세를 풍미한 영웅호걸들이야 어떠했겠는가.

여행 중에 알게 되었지만 영국인들은 같은 영어권인데도 미국식 발음으로 물으면 짐짓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애써 종주국의 우월감을 나타내려 했고, 프랑스인들은 영어로 물으면 알아듣고도 굳이 프랑스어로 대답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려했다. 특히 이들 두 나라는 도바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인접국이지만 구원(舊怨)이 깊었다. 중세기 때 영국으로 입성한 프랑스의 윌리암 1세가 영국의 왕위를 차지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양국은 승패가 교차되곤 했던 잦은 충돌에다 전 근세의 식민지 쟁탈전 때는 특히 아프리카와 북미대륙에서 운명적인 접전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나포레옹은 이집트 원정 때 먼저 로제타석을 보쌈해서 자기네 진영에 두고 총애했다. 바이킹의 피를 섞은 연적 영국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있었는데 한 판 승부를 피할 수 있었겠는가.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프랑스군을 대파시켰고, 또한 해전에서는 영국의 이순신장군으로 불리는 넬슨 제독은 적탄에 맞아 산화하면서도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괴멸시켜 제해권을 영국에 안겨주었다. 지금도 런던 시내 높은 탑 위에 있는 그의 동상 주변의 4마리 사자상은 프랑스 함대의 대포를 뜯어다 녹여 만들었다고 하니 영국 사람들의 속내를 곱씹을 만 하지 않은가.

그런 시대에 이집트에서 치른 영국과 프랑스의 알렉산드리아 대회전은 영국의 완승으로 결판났다. 그 결과 1801년 알렉산드리아 평화 협정을 계기로 프랑스 진영에 있던 로제타석은 물론,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노획했던 모든 전리품과 이집트의 식민권까지 영국의 수중으로 옮겼다. 그렇게 승승장구한 영국이기에 잉글랜드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로 구성된 섬나라 소연방(小聯邦)이 세계에서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하던 54개국 대연방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어떤 전쟁을 막론하고 항상 여자들이 더 많은 수난을 받았듯이, 로제타석도 팔자가 어떻다고 할 만큼 힘센 자에 이끌려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 그녀를 삼혼녀(三婚女)라고 곱지 않은 말을 입에 올리겠는가. 로제타석은 대영박물관이 자신의 궁정인 듯 영구적인 보금자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지극 정성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세계인이 연모하는 대상이며 내 인생 나그네 길에서 만난 구원의 여인상이다.

언제 윤리나 자기 의지가 위기 상황에서 맥을 추었던가? 일부종사한 여자라고 해서 유별나게 내세울 것이 뭐가 있으며 재혼인들 뭐가 꿀리고 삼혼인들 어떤가. 어차피 행복지수는 그 인연들 몫인데, 고루한 가치관이 그 범주를 넘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이지 싶다.

전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인들에게는 본받을 만한 것들이 참 많다. 섹스피어 한 사람을 두고 인도를 다 내어줄지라도 바꿀 수 없다고 한 것이라든지, 한 때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며 세상을 들끓게 했던 원저공은 초혼이 아닌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흔쾌히 내던졌던 것들 말이다.

그런데 로제타석은 내게 한 가지 의문과 연상의 줄을 늘이고 있었다.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나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처럼 왜 비(碑)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로제타석이라고 할까. 유명한 유적지엔 아직 정확하게 해독(解讀)되지 않은 고대 문자들이 많이 남아 있어도 가뭇없는 추측에 머물 뿐, 못 가려질 뻔 했던 역사의 한 가닥 진실을 그녀의 피하에 새겨져있는 세 가지 문자 덕분에 후세에 정사(正史)를 낳게 한 것 때문이었을까. 그럴 것만 같다. 어쩌면 비라는 것은 죽은 자의 기록을 담고 있는 사문(死文)일 텐데, 2천여 년 전의 역사를 해독하는 것은 산 자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로제타석은 유사이래 최고급의 보물이며 인류 역사 속에 살아있는 등신불이고 정사의 산 증인으로 공증된 것이리라.

그 해독의 비사를 들은 나는 삼혼녀 로제타석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몸은 영국에 안주해 있지만 일방적으로 영국에만 자정(慈情)을 쏟고 있은 속 터진 여심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성문자로 불리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은 영국에 결정적인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 주었다는 것 때문에서다. 로제타석이 영국으로 옮겨지기 전에 프랑스가 미리 혼인신고를 해 놓았듯이 그 석고 사본이 파리에 건네져있었다. 그것으로 프랑스인 샹폴리옹이 연구에 들어갔단다. 그 후에 필라에서 발견된 오벨리스크(첨탑전승비)의 고대 이집트어 텍스트를 병서한 그리스어 문장과 꼼꼼히 비교하여 해독의 실마리를 제공한 그리스어 덕분에 그 신성문자도 해독되었다고 했다. 거기에다 한 가지를 더해서 그 신성문자는 당초 표의문자였지만 표음문자로 진화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고 한다.

뒤늦은 잠에서 깨어난 이집트지만 자기 땅에서 귀인을 떠나보낸 마음이 어떻겠는가. 끈질기게 송환을 요구했는데 그때마다 영국은 이미 그녀는 어느 한 나라의 유물이 아리라 세계의 역사를 풀어헤친  산모이기 때문에 현재의 안식처에서 최적의 보살핌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는 뜻의 부답(不答)을 보냈다. 유네스코가 제정한 국제협약에도 “1971년 이후 강제로 빼앗긴 유물들에 한해 되돌려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돼 있다니, 이집트로선 자기네 나라가 로제타석의 친정이란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제타석이 보고 싶었다. 화려해진 외양 탓에 속으론 더 허전하다면 어찌할까. 나는 운무처럼 번져오는 연민 때문에 첫 만남 때의 사진첩을 펼쳤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 없었다. 대영박물관 안에선 촬영을 금했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임을 어찌 인화지를 통해서 확인할 건가. 로제타석은 내 인생의 광장(廣場)을 수시로 오가면서 만날 수 있다 해도 가까이에서 다시 보고 싶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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