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북을 배우니 큰상도 받고

2007.02.21 06:46

이수홍 조회 수:80 추천:9

북을 배우니 큰상도 받고 -전국고수대회 출전 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기) 이수홍 1998년 말, 37년간의 경찰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직했다. 정년퇴직을 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정년퇴직을 하고나면 누구나 앞으로 무엇을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마련이다. 나는 현직에 있을 때 배우고 싶었으나 배우지 못했던 국악(판소리와 북)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퇴직 3개월 전에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전주 모래내에서 율계농악단을 운영하는 한정연 선생을 찾아가 배우기 시작했다.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젊었을 때 콩쿠르에도 나갔으며, 유행가에 맞춰 북을 쳐 봤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무엇을 배우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 성격 때문인지, 선생님이 잘 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6개월 동안 창은 사철가 ‧ 호남가 ‧ 편시춘 ‧ 고왕금래 ‧ 쑥대머리 등을, 북은 7가지 장단을 배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석하게도 한 선생님이 이승을 떠나시고 말았다. 2000년 1월부터는 전북도립국악원 판소리 2반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단가 충효가를 배우고, 판소리는 춘향가를 배우는데 동초제라고 했다. 취미로 배우기 시작했지만 배운 것은 써먹어야 되고, 적당히 배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소리와 북을 도립국악원에서 계속 배우되 명고수를 찾아 북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창은 될 수 없지만 고수는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3월 20일부터 무형문화재로 명창이지만 북도 잘 치시는 홍정택 선생님에게 북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홍 선생님은 다음 두 가지를 당부하시고 교습을 하셨다. 첫째, 북은 말이 많은 것이다. 누구는 어떻고, 누가 잘 치고 등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라. 둘째, 모든 일은 마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니 우선 먼저 구음으로 외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 홍 선생님은 팔순이 넘었는데도 엄격하고 정성껏 가르쳤고 나도 열성을 다해 배웠다. 땀이 흠뻑 젖고, 숨을 몰아쉬면서까지 배웠다. 오전에는 도립국악원에서 창을 배우고, 오후에는 북을 배우며, 토 ‧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제백사하고 열심히 배웠다. 취미로 하는 것을 그렇게 고액과외까지 하느냐는 핀잔도 듣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아내가 용기를 북돋아주어 적어도 고수대회 노인부 대상은 받아야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뛰었다. 4월15일부터 17일까지 전주에서 전국고수대회가 열린다는 일정이 발표되었다. 처음부터 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출전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선생님께 “선생님! 선생님들은 죽지가 나지도 않고 날려고 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저도 아직 죽지가 나지 않았지만 이번 고수대회에서 출전경험을 얻고자 합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한참 생각하시더니 진심으로 경험을 얻고자 한다면 말리지 않겠다고 하셨다. 60세 이상 출전할 수 있는 노인부에 접수했다. 아내와 함께 다니며 두루마기를 맞추는 등 준비를 하였다. 대회일인 4월 15일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대회장소인 전북예술회관으로 갔더니 우리 내외밖에 나온 사람이 없었다. 한참 기다린 뒤 출전순서 추첨을 하였는데 7명중 6번을 뽑았다. 학생부 대회가 끝나고 노인부가 시작되었다. 앞사람 치는 것을 보니 세련된 것인지는 몰라도 폼은 엉성하여 별것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많이 긴장해 보였던지 아내가, “마음 푹 놓고 유행가에 맞춰 친다는 기분으로 막 치고 내려오세요.” 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내가 만난 창자는 천명희라는 처음 본 여자였다. 진양조, 중머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를 치고 내려왔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눈이 캄캄하여 객석은 보이지도 않고, 창자가 어느 바탕 어느 대목을 불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5분도 채 못치고 내려온 것 같았다. 삔(창에 장단이 맞지 않다는 말) 줄도 몰랐다. 혹시 장려상이라도 받을 수 있으려나 생각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첫 출전이니만큼 출전경험을 쌓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날 북을 배우러 갔을 때 선생님께서 하신말씀이 잊혀 지지 않는다. “이 선생! 다음대회가 열 석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13개월이나 남았으니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여유 있게 다시 시작하라고 하실 줄 알았다. 과연 선생님다운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기어코 노인부 대상을 받겠다는 각오로 계속 북을 배웠다. 선생님의 교습은 더 엄격해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틀리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까지 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보다 더 열성을 다했다. 창자와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오전 8시 30분부터 1시간 이상 북을 치고 몸에 땀이 젖은 채 도립국악원에 가서 또 북을 쳤다. 도립국악원 선생님은 내가 고수대회 출전준비를 하는 줄 알고 30분정도 창을 하여 북을 연습할 수 있게 해주었다. 2001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제21회 전국고수대회 일정이 발표되었다. 참가비 3만  원과 함께 참가 신청서를 냈다. 오전에는 홍선생님과 도립국악원에 가서 북을 배우고 오후에는 집에서 복습을 하였다. 1999년도 장년부 대상을 받은 Y님에게 CD를 틀어놓고 하루 8시간 연습을 하였다는 경험담도 듣고 두 번 지도를 받았다. 나도 서울 처조카사위에게 부탁하여 CD 5장을 넣고 듣는 플레이어를 구입하여 북을 연습하기도 했다. 2000년도 대회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밤 12시가 넘도록 연습하고 좋은 폼은 본을 받았다. 2000년도 비디오를 보고서야 내가 작년대회 때 첫 장단인 진양에서 삐었다는 것도 알았다. 창자들이 어떤 바탕 어느 대목을 많이 부르는지 분석도 했다. 북채 두 개가 빠개지고 오른쪽 어깨와 왼쪽 손목이 아파 파스를 붙이기도 했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세를 바로 잡으며, 아내의 지적도 받아 들였다. 대회날인 4월 14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홍 선생님으로부터 잘하라는 격려전화를 받았다. 작년처럼 늦게 시작할 줄 알고 아내와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느지막하게 개최장소인 전북예술회관에 갔더니 벌써 출전번호 추첨이 끝나버렸는데 나는 제일 끝번인 6번을 받았다. 작년대회 출전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세미 창에 북을 치고 내려오니 응원하러 온 친구들이 잘 쳤다고 칭찬해 주었다. 으레 하는 칭찬으로 알고 아내에게 틀리지나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실수는 없었다고 하였다. 처음에 좀 불안했으나 무난히 잘했다고 하여 그때에야 안심하고 점심을 먹었다. 예선이 모두 끝나고 본선 진출자를 발표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은 젊은 시절 승진시험 발표를 기다리는 심정과 꼭 같았다. 장려상 한 명과 결승진출자 3명을 발표하는데 내 이름 석자도 스피카 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왔다. 못해도 3등은 확보해 놓았으니 마음 놓고 푹 쉬고 내일 본선에 임하려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밤 12시가 넘도록 연습을 하였다. 아내도 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15일은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1번은 전남에서 온 여자인데 전문고수라는 등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고, 2번은 작년에 2등을 한 고창사람이었다. 1번 여자가 치는 것을 보고, 여유 있게 추임새를 넣든 2번이 첫 박을 잡지 못하고 실수를 하는 것을 보는 순간 안타깝다기보다는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김소영 창 심청가에 맞춰 북을 쳤다. 작년에 경험해서인지 창자가 어느 바탕을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순위 발표와 시상식은 다음날 경기전 야외무대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16일 TV채널을 KBS 2에 맞춰놓고 있는데 12시가 되자 전주방송 아나운서가 결승 중계방송을 시작하였다. “노인부는 어제 결승전을 벌여 이수홍 할아버지가 대상을 받았는데 오늘 중계방송을 하지 못해 아쉽다.” 고 했다. 내가 장원을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경기전에 가서 다른 부문 결승전을 보고 전체 수상자들과 함께 상장과 상금을 받았다. 많은 관람객 앞에서 상을 받는 기분은 엄청나게 좋았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여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기쁨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하면 된다는 교훈을 얻은 것도 값진 소득이었다. 다음날 아침 홍 선생님을 찾아가 큰절을 하며 관례에 따라 상장과 상금봉투를 드렸더니 선생님이 기뻐하시며, “10년, 15년이나 북 공부를 한 사람도 못해 내는데 이 선생은 재주가 있어 이렇게 빨리 해냈어요.” 라고 칭찬해 주셔서 가슴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큰했다. 나는 노인부보다 위 단계에서 젊은 사람들과 대결해보리라는 생각도 가졌다. TV, 신문보도를 보고 축하 화분을 보내주거나 축하전화를 주신 분들과 예선 ‧ 결선 때 찾아와서 응원해주고 시상식 때 꽃다발까지 안겨준 김수영, 잉꼬모임 총무 이정선, 국악원 동료들도 감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상을 받기까지 나에게 격려와 응원을 해 준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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