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귀찮아

2007.03.09 11:20

박영임 조회 수:82 추천:4

귀찮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박영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다. 머리 속은 비워놓은 채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다. 하루에 거울을 50번 이상 바라보지만 전용 컴퓨터 앞에는 동그란 거울이 언제나 놓여있다. 누워있는 거울을 바로 세워야 얼굴을 볼 수가 있으나 오늘은 만지기도 싫다. 온종일 컴퓨터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벌써 14시간이 지나고 있다. 혼자서 밥을 먹으려고 식탁을 챙긴다는 것은 너무나 귀찮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잊는지 오래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시간에 잠을 잤다. 커피 한 스푼과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넉넉히 부어 컴퓨터 옆에 놓고 마신 것이 고작이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이 방바닥에 떨어졌지만 팔을 뻗어 다시 어깨에 걸치는 것조차 귀찮다. 발로 들어 올려볼까 생각했지만 귀찮아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침 6시 30분에 기상시간을 맞추어 놓았던 휴대전화기가 요란스럽게 단잠을 깨운 주범이다. 그 휴대전화기를 진동으로 해서 던져놓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조차 더 귀찮다. 컴퓨터 옆에 놓인 전화기와 주방과 거실에 놓인 집전화기가 동시에 울려댄다. 시끄러워 플러그를 뽑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그냥두었다. 옆에 있는 화장지를 뜯어 귓구멍을 막았다. 딩동, 딩동, 이번에는 인터폰에서 요란한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귀찮지만 혹시나 하여 인터폰 화면을 들어다 보았다. 낮선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얼굴이라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일으켜 세운 주범이 아니던가! 무엇 때문에 방문하려 했을까?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결국 주방에서 볼 수 있는 창가에 서서 그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들은 앞집에 가서도 벨을 울려놓고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린다. 대면하기 싫은 두 여인들은 텅 빈 골목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한 여인은 윗집으로 걸어가 벨을 울린다. 윗집 여자는 대문을 여는 대신 뛰쳐나와 담 너머로 고개를 삐죽 내민다. 뒤늦게 앞집 여인도 고개를 삐∼죽 내밀고 두 여인이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본다. 고요한 거실에 찬바람만 휘돌고 있다. 어깨를 감싸고 또다시 컴퓨터 방으로 들어왔지만 마우스 움직이는 것도 귀찮다. 한참 컴퓨터 화면을 주시하다가 거실로 나왔다. 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베란다의 겨울풍경을 바라보았다. 추운 겨울이 싫다고 베고니아 꽃이 울고 있었다. 네가 울면 나는 어찌 하냐고 위로하며 눈물이 마른 꽃잎을 따주고 싶었지만 유리창문을 열기가 귀찮다. 동백꽃 몇 송이가 피는 것 같더니 어느새 시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집 동백꽃은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 말처럼 눈물같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바람이 놀러오지 않는 베란다의 동백꽃은 '쿵'하며 가슴이 무너지듯 커다란 송이채 떨어진다. 동백꽃 송이가 떨어지는 날 예쁜 화구에 물을 담아 꽃잎을 한 잎씩 물위에 띄우고 싶다. 선반 위에 올려진 화구를 미리 꺼내 놓고 싶어 발돋움을 하여도 닿지 않는다. 귀찮다는 생각에 그만둘까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옆에는 컴퓨터 의자에 올라가볼까? 하지만  바퀴가 달려 불안하다. 무겁지만 식탁의자를 움직여 안전하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갔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수저통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냉장고가 눈앞에 있다. 저 냉장고 문만 열면 허기진 것이 해결되지만 정말로 귀찮다. 배속에서는 천둥이 치기 시작한지 벌써 오래다. 망설이던 오른손이 움직였다. 김장 김치가 적당히 익었다. 접시에 한 포기를 담았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손가락으로 길게 만들어 밥숟가락과 함께 입안 가득 넣었다. 적당한 염기와 씹히는 엇박자를 즐겼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게 사는 거야! 먹기 위해서 사는 거야.'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나의 주장을 처음으로 부인했다. 이제 배가 부르니 더욱 귀찮아졌다. 따듯한 이불 속에 몸을 깊숙이 감춘다. 굳게 잠긴 현관문을 누군가 열고 있다. 아이들이 올 시간은 아닌데,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천안에 가있는 남편이 예고도 없이 돌아왔다. 이어서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저녁을 먹어서 아무 생각이 없다는 식구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놓았다. 배가 부르다더니 어느새 그릇이 비워졌다. 귀찮아 그냥 돌아서려는데. 빈 그릇은 어느새 손에 붙어 있었다. 거실 바닥 역시 아들이 사용하고 던진 젖은 수건이 내 신경을 자극한다. 정말 귀찮아 그냥 지나가려는데 수건은 어느새 발목에 매어있다. 그래 내가 사는 이유는 아직은 이것일거야. "내가 필요함보다 나를 필요한 곳에 내가 있음에 감사하자!" 쌓인 먼지를 사랑하고, 냄새나는 쓰레기를 사랑하자. 설거지를 즐기며 지저분한 빨랫감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때로는 나를 놓지 않는 지독한 귀찮음까지도 사랑해보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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