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완장 찬 영덕대게

2007.03.10 07:25

임두환 조회 수:210 추천:7

완장 찬 영덕대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기)  임두환 오늘은 ‘영덕대게’를 맛보는 날이다. 영덕대게라면 모르는 이가 없겠지만, 나는 좀처럼 맛볼 기회가 없었다. 영덕대게는 매년 12월부터 3월까지가 제철이고, 경칩 무렵이면 대게 맛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한다. 남들은 몇 번씩이나 다녀왔다고 자랑들인데, 호기심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려니 괜스레 쑥스럽기만 했다. 나도 이번에는 영덕대게 맛을 보고 와서 큰소리를 쳐야지 싶었다.       내가 가입한 모임 중에 목심회(睦心會)란 단체가 있다. 목심회라고 하니 듣는 이에 따라서는 소나 돼지고기 목심으로 착각도 할 것 같다. 회원이 다섯 명이어서 명칭을 5인회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를 해봤지만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이 모임에서는 외국여행도 몇 번이나 다녀왔고, 국내여행도 여러 차례 했지만, 이번에는 영덕대게 맛을 보러 가자며 안동 ‧ 영덕 ‧ 울진코스로 일정을 정했다. 안동하회마을과 울진백암온천도 관심거리였지만, 우리 는 오직 영덕대게 맛을 본다는데 끌렸다.   우리일행은 3월 3일 토요일 오전 9시에 1박 2일 일정으로 부부동반해서 모두 열 명이 여행길에 나섰다. 차량은 15인승 봉고차였고, 운전은 회원들이 교대로 하기로 했다. 오랜만의 장거리여행이어서 차량에 내비게이션(navigation)도 장착하였고, 관광용지도와 구급약품까지도 준비했다. 총무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음식은 준비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술과 먹을거리를 푸짐하게 장만하여 박수로 보답해 주었다. 출발하기 전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입씨름이 생겼다. 여행코스로 안동 ‧ 영덕 ‧ 울진을 거쳐 전주로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운전하는 회원은 고속도로를 따라 대전 ‧ 상주 ‧ 안동코스로 가자며 거리는 멀지만 시간은 단축된다고 했고, 회장은 국도를 따라 무주 ‧ 김천 ‧ 상주 ‧ 안동으로 쉬엄쉬엄 구경삼아 가자고 하였다. 두 사람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결국은 회장 의견에 따르기로 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국도를 따라 가노라니 차창 밖의 경치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진안을 거쳐 무주를 지나는 길에 산중턱으로 펼쳐진 안개구름이며,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짙푸른 용담호도 보였었다. 도로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도, 살포시 웃음 짓는 산수유 꽃망울에도 봄은 이미 찾아와 있었다. 영동을 지나서 황간을 거치는 길에 미군들이 저지른 ‘노근리 양민학살’ 현장도 목격했다. 굴다리 시멘트벽 총탄 맞은 흔적에서 찌릿함을 느꼈고, 47년간이나 묻혀왔던 기막힌 사건이라서 그랬던지 울분이 치솟았다.   김천을 지나는 길에 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며, 국내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직지사(直指寺)에 들렀다. 주변경관이 넓고 건물들도 웅장했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영조 11년에 중창했다는데, 화려한 벽화에 눈길이 끌렸다. 대웅전 앞 3층 쌍탑은 통일신라석탑으로 보물 제606호로 지정돼 있었다. 30대에 주지가 되어 의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크게 승리했던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시는 사명각, 승려들의 교육장으로 쓰인다는 만덕전의 규모에서 불심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안동하회마을은 풍산 유씨가 600여 년간 세거했던 동성마을로서,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곳을 찾아 방문했던 마을이기도 하다. 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민속마을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공을 세운 서애(西厓) 유성룡 선생이 태어났기에 널리 알려졌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리적 여건으로 외침을 한 번도 겪지 않아, 상류층의 기와집에서부터 민가의 초가토담집에 이르기까지 잘 보존돼 있었다. 안동 양반고을에는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유명하여 찾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온종일 국도를 따라, 경북 영덕 강구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30분쯤이었다. 저녁 불빛에 강구항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KT&G영덕지점에 부탁하여 강구항에서 유명하다는 ‘어촌대게’집에 예약을 해놓았었다. 강구항에는 영덕대게 전문점만 200여 곳이고, 일반취급점까지 합치면 모두 500여 곳이 넘는다고 했다.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강구항의 대게타운은 전국의 손님을 모시는데 여념이 없었다.   예약해 놓았던 ‘어촌대게’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주손님들 오셨다고 호들갑들이었다. 총무하고는 미리 연락이 됐던지, 분위기 좋고 따뜻한 방으로 자리가 잡혀 있었다. 싱싱한 대게를 먹으려면 물건을 잘 골라야 한다며, 주인장은 총무와 나를 수족관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수족관에는 영덕대게가 종류별로 모두 모여 있었다. 많은 대게들 중에는 웬일인지 ‘완장을 차고 있는 대게’가 눈에 띄었다. 의아해서 주인에게 물어봤다. “이곳 수족관에 있는 대게는 어찌 완장을 차고 있나요?”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영덕대게에도 박달대게[진품], 갓바리대게[유사품], 수입산 대게 등 여러 종류가 있다며, 완장을 찬 대게가 영덕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진품이라고 했다. 암컷대게는 무조건 살려주어야 하고, 수컷도 9cm미만을 잡으면 벌금이 따른다고 했다. 영덕에서는 다른 대게와 구별하여 신뢰도를 높이고자, 영덕군청에서 대게 발가락에 가락지를 끼운다고 했다. 가락지에는 잡은 날짜, 선박(船泊)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가격에서도 차이는 났다. 박달대게는 마리당 25,000원대였고, 갓바리대게는 12,000원대였다. 내 생각으로는 갓바리대게는 전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홍게가 아닌가 싶었다. 수족관에 들어있는 영덕대게 중에도 수입산 대게가 섞여 있어서 내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웠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렸던 영덕대게가 불그스레하게 치장을 하고선 얼굴을 내밀었다.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영덕대게찜이었다. 대게를 다루는 아줌마들의 손놀림이 여간 아니었다. 가위로 몸통과 다리를 잘라내고, 또다시 몸통을 4등분 하는 데는 눈 깜작할 사이였다. 손질을 끝낸 아줌마는 유치원생 대하듯, 우리에게 대게 먹는 방법을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다리 한쪽을 살며시 꺾어 잡아 빼니 하얀 속살이 나왔다. 다리 속살과 몸통의 육질은 먹을수록 쫄깃쫄깃하고 담백했다. 마무리음식으로 들여온, 대게등껍질 비빔밥도 천하일미였다. 오늘 만큼은 더 이상 부러워할게 없었고, 모두가 내 세상 같았다.   우리는 강구항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젯밤 주거니 받거니 마셨던 한 잔 술의 숙취를 풀고자 아침은 대게탕으로 정했다. 어찌나 국물이 개운하고 담백했던지 이런 맛은 처음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마냥 흐뭇해하는 일행들의 모습에서 영덕대게 먹으러 잘 왔구나 싶었다. 숙소를 떠날 즈음인데, 아내는 아들 딸, 사위생각이 났던지 내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한마디 했다.   “여보, 모처럼 영덕까지 왔는데, 그냥 갈라요?” 하는 것이었다. 그렇겠다 싶어서 ‘완장을 찬 영덕대게’ 6마리를 골라 포장을 했다. 진품이라며 요리방법까지 알려주는 주인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 일행은 울진에 있는 천연알칼리성 라듐성분을 함유한 ‘백암온천’에서 쌓였던 여독을 개운히 씻어버렸다. 주변의 산세(山勢)가 어찌나 수려한지, 며칠 동안 푹 쉬어갔으면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안동 간고등어 맛도 봐야 한다는 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안동에서 점심을 때우고는 서둘러 왔는데도, 전주에 도착하니 날은 저물어 있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는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였다. 오랜만의 부부동반이어서 너무도 좋았다. 모든 시름 다 잊어버리고 구경하는 재미, 먹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곳저곳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서 답답했던 내 가슴은 확 트였다. 내일 저녁에는 아들딸, 사위와 둘러앉아 영덕대게를 맛있게 먹어야겠다. (20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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