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아내의 일기

2007.03.12 19:41

김병규 조회 수:136 추천:6

아내의 일기                               행촌수필문학회 김병규 우리 내외가 경찰서에서 소환장을 받았다. 70평생 살면서 남의 뺨 한 번 때리지 못한 나였고, 남 앞에서 큰소리 한 번 치지 못하고 살아온 아내가 폭행자로 고소를 당하여 피의자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사위였던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예고 없이 우리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서 고소를 한 것이다.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다. 진술의 일부를 자필로 쓰라는 수사관의 요청이 있었다. 나는 그때 상황(狀況)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으나, 아내는 무척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얽힌 사연을 글로 쓰기에는 자신이 없는 듯, 수사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사관의 독촉에 떨리는 손으로 아내도 글을 썼다. “사건 당시 나는 전북대학교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통원치료를 하는 환자였습니다. 폭행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 두 마디의 말을 써서 수사관에게 제출하고는 아쉬운 듯 물러나는 아내의 모습이 몹시 곤혹스럽게 보였다. 얽혀있는 억울한 사연을 모두 털어서 자필로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마는, 꾹 눌러 참고 속울음을 삼키고 있는 아내가 측은하게 보였다. 아내는 글이 짧은 처지로 67년이나 살아온 과거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남존여비사상이 완고했던 시절, 중농의 집에서 태어난 아내는 학교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 겨우 어깨너머로 한글만 깨우친 아내였지만, 결혼당시 나는 그녀가 적어도 중학교는 나왔으리라 생각했었다. 결혼하고 훨씬 뒤에야 못 배워서 한이 서린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의 학력도 모르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당시 나는 사람 하나면 되었지 학력 따위를 문제 삼을 생각도 않았다. 아내는 손자를 일곱 명이나 둔 뒤에야 주부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늦게나마 공부를 계속하려던 아내의 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또 중단하게 되었다. 부부학교 2년 수료의 실력으로 경찰서 수사관 앞에서 진술서를 쓴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난생 처음 폭행범으로 고소를 당한 몸으로 경찰서 수사관 앞에서, 자기의 억울한 사연을 글로 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내가  쓴 글을 읽어 자신의 견해까지 이야기하는 아내의 독서실력을 평가할 만도 하다. 다만 글 쓰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수사관 앞에서 자기의 억울한 사연을 글로 시원하게 쓰지 못한 것이 응어리가 되었나 보다. 진술서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아내는 절실히 깨달은 듯, 글 쓰는 요령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두 말 없이 매일 거르지 말고 일기를 쓰라고 했다. 날마다 자신에게 있었던 사실을 적은 가록을 일기라 한다.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저절로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는 좋은 일이 있다. 때로는 심란하고 짜증나며, 고통스런 궂은일도 있다. 하룻길을 가다보면 중도 보고 소도 본다는 말이 있다. 불심을 닦는 스님의 근엄한 모습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말일 테고, 우직하나 자기를 희생하며 묵묵히 일하는 소를 바라보고 자신의 그릇됨을 다스리라는 뜻일 테다. 일기를 쓰면, 자신의 잘못이나 그릇된 행동을 회개하고 반성할 기회가 되어 좋고, 덤으로 문장실력도 향상되어 일석이조의 소득이 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이정희 국어선생님이 권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쓴 일기의 부피는 꽤나 되었다. 일기장의 부피만큼이나 문장실력도 늘었고 자신을 닦는 귀중한 순간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쓰던 습관과 써놓은 일기장은 이사를 12번이나 다니던, 불안정하고 고달픈 삶을 사노라 몽땅 잃어버렸다. 20여년 가까이 일기쓰기는 물론 자신의 관리에 소홀한 채, 생활전선에 매달려서 정신 못 차리게 살았다. 네 아이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던 1994년 초 일기를 다시 쓰기로 했다. 2006년 12월 31일까지 대형 노트 한 권에 12년의 일기를 모두 담았으니 일기랄 수는 없지만, 그 노트는 우리 집의 가보처럼 소중하다. 정해년에 들어서는 일기 쓰기를 착수해서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하려고 결심했다. 하루 생활이 끝난 깊은 밤, 아내와 나는 개다리소반을 나란히 놓고 마주앉아 일기를 썼다. 다 쓴 아내의 일기는 같이 검토를 했다. 사투리 투성의 부적절한 단어,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 어울리지 않는 문맥을 지적하여 매일 공부를 하니 아내의 글 솜씨는 날로 향상되고 나에게도 적잖은 공부가 되었다. 다소 자신이 생긴 듯, 3월부터 아내는 자신의 일기 보여주기를 꺼려하였다. 그럴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내가 쓴 일기는 아내가 마음대로 보도록 허용하였다. 아내가 보아 마음상하거나 오해할 만한 내용은 쓰지 않도록 주의하여 쓰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다. 반면에 아내의 일기에는 다소의 비밀이 들어있는 것 같다. 몹시 춥던 어느 날, 친구의 유혹으로 말없이 외출을 했다가 집에 전화도 없이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때가 있었다. 이 추운 날 나의 행방에 대하여 아내는 걱정하며 하룻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날 아내의 일기에는 내가 평소 생각도 못했던 아내의 마음이 들어있었다. “남편은 젊은 날의 바람기가 도졌나 보다. 곤드레만드레 술 마시고 수시로 외박하여 속을 썩이던 남편의 젊은 날이 생각난다. 그때가 문득 떠올라 미운 생각이 든다. 남편은 밖으로 돌며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화려한 젊은 날을 보냈지만, 나는 허풍 떨던 남편 따라 고통과 슬픔의 세월을 보냈다. 23살에 일정한 직업도 없는 남편 만나 사는 동안에 행복했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집살이 3년 만에 병만 처지고, 분가랍시고 했지만 실업자인 남편 따라 사는 동안 가난의 고통에 시달렸다. 네 자식을 기르는 데는 잔재미도 있었지만 빈곤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가장의 책임을 다 하려고 애쓰는 남편의 모습이 보일 때는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때로는 고맙기도 했고 든든하기도 했지만 원망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이렇게 아내의 가슴에는 기쁨보다 슬픔이, 행복보다 불행과 원망이 쌓였던가 보다. 아내의 일기를 훔쳐보며,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패기에 넘치던 젊은 날, 허파에 바람 들어 허황된 길도 걸어왔고, 때로 헛길에서 방황하기도 했었다. 아내의 숨어있는 가슴앓이 앞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해 본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을 가져본다. 내 비록 고희의 고개를 넘겼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넉넉하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데 성심을 다 하고 싶다.                 (2007.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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